[중동의 역사] 26/52화: 십자군 전쟁: 중동이 기억하는 200년 전쟁의 진실
들어가며 — ‘십자군’이 아닌 ‘프랑크인의 침략’
우리가 ‘십자군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중동의 무슬림들은 전혀 다른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아랍어 사료에서 이 전쟁은 ‘알-후루브 알-살리비야'(الحروب الصليبية)라는 이름보다, 오히려 ‘프랑크인의 침입'(غزوات الفرنجة)이라는 표현이 훨씬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서유럽에서 온 침략자들을 국적이나 종교와 무관하게 통칭 ‘프랑크(알-이프란즈)’라 불렀던 것입니다. 이 명칭의 차이 자체가,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두 문명권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지난 25화에서 살펴본 셀주크 튀르크의 등장은 이슬람 세계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재편의 혼란기에, 서쪽에서 예상치 못한 군사적 폭풍이 밀려왔습니다. 1096년부터 약 200년간 이어진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 역사에서는 흔히 ‘성지 탈환을 위한 신앙의 전쟁’으로 서술됩니다. 하지만 중동의 시각에서 이 전쟁은 전혀 다른 맥락을 갖습니다. 이번 26화에서는 아랍·무슬림 사료를 중심으로, 십자군 전쟁의 200년을 중동의 눈으로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1. 1차 십자군 전야 — 분열된 이슬람 세계
셀주크 제국의 균열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파한 셀주크 튀르크는,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부 분열에 휩싸였습니다. 1092년 위대한 술탄 말리크 샤가 사망하자, 제국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소왕국으로 쪼개졌습니다. 룸 셀주크(아나톨리아), 시리아 셀주크, 이라크 셀주크가 각각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고, 이들 사이의 권력 투쟁은 이슬람 세계의 군사적 대응 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습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황은 특히 복잡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투투시 가문, 알레포의 리드완, 안티오키아 인근의 야기-시얀 등 셀주크 계열의 군벌들이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외부의 적보다 서로를 더 경계했고, 때로는 기독교 세력과 동맹을 맺어 동료 무슬림을 공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파티마 왕조와 수니파의 대립
23화에서 다룬 파티마 왕조는 이 시기에도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와 수니파인 셀주크 계열 군벌들 사이의 종파적 적대감은 매우 깊었습니다. 예루살렘은 1098년, 십자군이 도착하기 불과 1년 전에 파티마 왕조가 셀주크로부터 탈환한 도시였습니다. 파티마 조정은 처음에 십자군을 셀주크에 대항하는 잠재적 동맹으로까지 고려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분열은 단순한 정치적 불화가 아니었습니다. 아바스 조의 칼리프는 바그다드에서 명목상의 종교적 권위만 유지하고 있었고, 실질적 군사력은 지역 군벌들에게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11세기 말의 이슬람 세계는 거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통합된 방어 체계를 구축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소수의 십자군 기사들이 광대한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비잔틴의 구원 요청과 교황의 야심
아랍 사료들은 1차 십자군의 직접적 계기에 대해 비교적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1095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한 것은, 중동의 관점에서는 ‘루미(로마/비잔틴)의 왕’이 서방의 동맹을 끌어들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교황이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 —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Deus vult)” — 은 아랍 연대기 작가들에게는 기록할 가치조차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왜 프랑크인들이 왔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들이 들어왔고 무엇을 저질렀는가였습니다.
2. 1차 십자군(1096~1099) — 충격과 혼돈
안티오키아 공방전 — 이슬람 분열의 대가
1097년 10월, 십자군은 시리아 북부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안타키야)를 포위했습니다. 이 도시의 셀주크 총독 야기-시얀은 인근 무슬림 군벌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알레포의 리드완은 야기-시얀과의 개인적 갈등 때문에 원군 파견을 주저했고,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는 자신의 영토 확장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랍의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시르(Ibn al-Athīr, 1160~1233)는 그의 대작 알-카밀 피 알-타리크(역사의 완성)에서 이 상황을 통탄하며 기록합니다:
“이슬람의 왕들이 서로 분열하여, 각자가 이웃의 왕을 적으로 삼았다. 프랑크인들이 나라를 정복한 것은 이 분열 때문이었다. 알라만이 이슬람과 무슬림을 도울 수 있으시다.”
8개월간의 포위 끝에, 1098년 6월 안티오키아는 내부 배신으로 함락되었습니다. 십자군이 도시에 진입한 후 벌인 학살은 아랍 사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기-시얀은 도주 중에 사망했고, 도시의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 다수가 살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함락(1099년 7월 15일) — 중동사의 트라우마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을 돌파했습니다. 이날 벌어진 사건은 중동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아랍 역사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 참상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븐 알-아시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프랑크인들이 도시를 점령하자, 일주일 동안 무슬림을 학살했다. 알-아크사 모스크에서만 7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으며, 그중에는 이맘과 학자, 경건한 수행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이 모스크 근처에 와서 기도하고 은둔 수행을 하던 이들이었다.”
7만이라는 숫자는 아랍 사료 특유의 과장일 가능성이 있지만, 현대 역사학자들도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대학살이 실제로 발생했음을 인정합니다. 십자군 측의 기록 자체가 “무릎까지 피가 찼다”고 묘사할 정도입니다. 무슬림뿐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도 회당에 갇힌 채 불태워졌습니다. 동방 기독교인조차 완전히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이 학살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단순한 전쟁 잔혹 행위를 넘어섭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예루살렘은 ‘알-쿠드스(القدس, 거룩한 도시)’로 불리며, 메카·메디나에 이은 제3의 성지입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밤의 여행(이스라)’에서 승천했다고 믿어지는 바위의 돔(쿱바트 알-사크라)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위치한 곳입니다.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 벌어진 학살은 이슬람 집단 기억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후 수십 년간 ‘지하드(성전)’ 동원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무슬림 세계의 초기 반응 — 놀라울 정도의 무관심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충격적 사건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즉각적 반응이 극히 미미했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전해 들은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 궁정에서는 공식적인 규탄 성명이 나왔지만, 실질적인 군사 행동은 없었습니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군벌들은 여전히 서로의 영토를 노리느라 바빴습니다.
1099년 말, 예루살렘에서 도망친 난민들 일부가 바그다드에 도착하여 칼리프의 금요 예배 시간에 모스크에 난입, 울부짖으며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이 장면은 아랍 연대기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 후에도 실질적인 군사적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분열된 이슬람 세계에서, 먼 변방의 비극은 각 군벌의 당면 이해관계를 바꿀 만큼 강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십자군 국가의 수립과 공존의 현실
네 개의 십자군 국가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레반트 해안에는 네 개의 라틴 기독교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 예루살렘 왕국(1099~1291):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초대 통치자.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십자군 국가.
- 안티오키아 공국(1098~1268): 보에몽 드 타란토가 세운, 시리아 북부의 노르만 국가.
- 에데사 백국(1098~1144): 가장 먼저 세워지고 가장 먼저 멸망한, 유프라테스 상류의 전초 기지.
- 트리폴리 백국(1102~1289): 레바논 해안에 세워진 소규모 국가.
이 네 국가의 총 인구에서 프랑크인(서유럽 출신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극소수였습니다. 주민 대다수는 아랍 무슬림, 동방 기독교인(그리스 정교회·아르메니아·시리아 기독교인), 유대인, 드루즈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군 국가는 본질적으로 소수의 군사 귀족이 다수의 비(非)라틴 주민을 지배하는 식민 구조였습니다.
아랍인의 눈에 비친 프랑크인들
중동에 정착한 십자군에 대한 아랍인의 관찰 기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12세기 시리아의 기사이자 작가인 우사마 이븐 문키드(Usāma ibn Munqidh, 1095~1188)는 자서전 키타브 알-이으티바르(교훈의 서)에서 프랑크인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의 글은 십자군 시대의 문화적 접촉을 이해하는 데 가장 귀중한 1차 사료 중 하나입니다.
우사마는 프랑크인들에 대해 복합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그는 그들의 용맹은 인정하면서도, 문화적 수준에 대해서는 종종 경멸적이었습니다:
“프랑크인 — 알라가 그들을 저주하기를 — 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야만적이다. 그들은 용기와 전투 정신 외에는 어떤 미덕도 중시하지 않으며, 기사와 성직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우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사마의 기록에는 프랑크인들과의 우정, 상호 존중, 심지어 유머러스한 일화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기도할 때, 오래 정착한 성전기사단원들이 자신에게 기도 공간을 양보해주었다고 회고합니다. 반면 새로 도착한 십자군은 그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폭력적으로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사마는 이를 통해 “오래 정착한 프랑크인은 새로 온 자들보다 훨씬 나았다”고 평가합니다.
이 관찰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십자군 정착민들은 현지 문화에 상당 부분 동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랍식 목욕 문화를 받아들이고, 현지 음식을 먹고, 아랍어를 배우고, 심지어 아랍식 의복을 착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혼융은 십자군 전쟁이 단순한 문명 충돌이 아니라, 복잡한 문화적 교류의 장이기도 했음을 보여줍니다.
의학의 만남 — 문명 격차의 단면
우사마 이븐 문키드가 기록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의학에 관한 것입니다. 무슬림 의사가 종기를 약초 처방으로 치료하려 했는데, 프랑크인 의사가 와서 환자의 다리를 도끼로 잘라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환자는 사망했습니다. 우사마는 또 다른 일화에서, 여성 환자의 얼굴에 난 종기를 프랑크인 의사가 십자가 모양으로 째고 소금을 문질렀다고 기록합니다.
22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시기 이슬람 세계의 의학은 이븐 시나의 의학전범을 기반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반면 서유럽의 의학은 아직 경험적·미신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학은 당시 두 문명 사이의 문화적 격차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분야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화를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서유럽에도 유능한 의사들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십자군 국가의 병원들은 이슬람 의학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이 예루살렘에서 운영한 병원은 당대 최대 규모의 의료 시설 중 하나였으며, 무슬림 의사들이 이 병원에서 근무한 기록도 있습니다.

4. 이슬람 세계의 반격 — 장기·누르딘의 지하드
이마드 앗-딘 장기(1127~1146) — 반격의 첫 불꽃
십자군 국가 수립 후 약 30년간, 이슬람 세계의 대응은 산발적이고 비효과적이었습니다. 전환점은 1127년, 이마드 앗-딘 장기(عماد الدين زنكي)가 모술의 아타베그(총독)로 임명되면서 찾아왔습니다. 장기는 튀르크계 군인 출신으로, 셀주크 체제의 지방 관리자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군사적·정치적 능력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장기의 전략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습니다. 먼저 분열된 무슬림 도시국가들을 통합하고, 그다음 십자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한다. 그는 1128년 알레포를 장악하고, 이어서 시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를 통합하여 셀주크 분열 이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규모의 통합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1144년 12월, 장기는 십자군 국가 중 가장 취약했던 에데사 백국을 함락시켰습니다. 이것은 1차 십자군 이후 무슬림이 주요 십자군 거점을 탈환한 최초의 사례였으며, 이슬람 세계에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에데사 탈환은 반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랍 시인들은 장기를 찬양하는 시를 썼고,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그에게 명예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장기는 지하드의 깃발을 처음으로 효과적으로 든 지도자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의 동기가 순수한 종교적 열정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야심의 수단으로 지하드 이념을 활용한 것인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누르 앗-딘(1146~1174) — 지하드 국가의 건설자
장기가 1146년에 자신의 노예에게 암살된 후, 아들 누르 앗-딘 마흐무드(نور الدين محمود)가 알레포를 중심으로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했습니다. 누르 앗-딘은 아버지보다 더 체계적이고 이념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군사 정복을 넘어, ‘지하드 국가’라는 이념적 프레임워크를 구축했습니다.
누르 앗-딘의 통치 방식은 다층적이었습니다:
- 군사적 차원: 정규군을 강화하고, 성채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십자군에 대한 방어선을 체계화했습니다.
- 종교적 차원: 수니파 정통성을 강조하는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대거 건설하고, 울라마(이슬람 학자)들을 후원하여 지하드 이념을 체계적으로 전파했습니다.
- 선전적 차원: 예루살렘 탈환을 최종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민바르(설교 강단)를 미리 제작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유명한 민바르는 실제로 후에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알-아크사 모스크에 설치되었습니다.
- 정치적 차원: 1154년 다마스쿠스를 무혈 입성으로 장악하여, 시리아 전체를 하나의 정치 체제 아래 통합했습니다.
누르 앗-딘의 가장 중대한 전략적 결정은 이집트에 대한 개입이었습니다. 1160년대, 쇠퇴하는 파티마 왕조를 둘러싸고 누르 앗-딘과 예루살렘 왕국이 경쟁적으로 이집트에 원정군을 파견했습니다. 이 경쟁에서 최종 승리한 것은 누르 앗-딘이 보낸 쿠르드 출신 장군 시르쿠와 그의 조카 살라흐 앗-딘(살라딘)이었습니다. 1171년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를 종식시키고 이집트를 수니파 아바스 칼리프의 명목적 권위 아래로 복귀시켰습니다.
이로써 시리아-이집트가 하나의 정치 체제로 묶이게 되었고, 십자군 국가들은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압박받는 전략적 포위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누르 앗-딘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74년에 사망했지만, 그가 구축한 정치적·이념적 기반은 살라딘이라는 후계자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됩니다.
5. 2차 십자군(1147~1149) — 서유럽의 좌절
에데사 함락의 충격파
장기의 에데사 함락은 서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1145년 십자군 소집 교서 퀀텀 프라에데체쏘레스(Quantum praedecessores)를 발표했고, 시토회 수도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열정적인 설교를 통해 대규모 원정을 조직했습니다.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 왕 콘라트 3세가 이끄는 2차 십자군은 1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왕실 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중동의 아랍 사료에서 2차 십자군은 거의 웃음거리에 가깝게 서술됩니다. 수만 명의 대군이 아나톨리아를 통과하면서 셀주크 튀르크의 공격과 질병, 보급 문제로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시리아에 도착한 잔여 병력은 에데사 탈환이라는 원래 목표를 포기하고, 대신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는 전략적 오류를 범했습니다.
다마스쿠스 공방전의 아이러니
1148년 7월의 다마스쿠스 공방전은 2차 십자군의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마스쿠스의 부리드 왕조는 이 시점까지 예루살렘 왕국과 실질적인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 양측은 장기와 누르 앗-딘이라는 공통의 위협에 대항하여 협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한 것은 이 동맹을 파괴하는 자충수였습니다. 다마스쿠스의 부리드 왕조는 긴급히 누르 앗-딘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누르 앗-딘의 원군이 접근하자 십자군은 불과 4일 만에 포위를 풀고 철수했습니다. 이 패배로 다마스쿠스는 결국 누르 앗-딘에게 기울었고, 1154년 다마스쿠스의 무혈 합병으로 이어졌습니다. 2차 십자군은 적을 강화시키고, 동맹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간 것입니다.
6. 살라흐 앗-딘(살라딘)과 예루살렘 탈환
쿠르드 출신 영웅의 부상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بن أيوب, 1137~1193) — 서유럽에서 ‘살라딘’으로 알려진 이 인물은, 중동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쿠르드족 출신의 군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 시르쿠를 따라 이집트 원정에 참가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1169년 시르쿠가 갑자기 사망하자, 31세의 살라딘이 이집트의 재상직을 물려받았습니다. 2년 후인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 알-아디드가 사망하면서, 살라딘은 이집트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시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누르 앗-딘의 제국을 사실상 계승했습니다.
살라딘의 부상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누르 앗-딘의 가문과 지지자들은 살라딘을 찬탈자로 보았고, 그는 1174년부터 1186년까지 약 12년간 주로 다른 무슬림 세력들과 싸우며 권력을 공고히 해야 했습니다. 아랍 사료에서 살라딘에 대한 평가는 이 시기에는 다소 엇갈립니다. 일부는 그를 누르 앗-딘의 유산을 빼앗은 배은망덕한 자로, 다른 일부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다시 통합하는 필수적 지도자로 보았습니다.
하틴 전투(1187년 7월 4일) — 결정적 승리
1187년은 중동 역사의 전환점이 된 해입니다. 그해 봄, 살라딘은 약 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갈릴리 지역으로 진격했습니다. 7월 4일, 티베리아스 호수 서쪽의 하틴(حطين) 평원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주력군과 결전을 벌였습니다.
전투의 전개 과정은 살라딘의 뛰어난 전략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여 십자군을 유인한 후, 그들이 수원(水源)이 없는 건조한 지형을 가로질러 행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7월의 폭염 속에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갈증에 시달리며 행군한 십자군은, 하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전투력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살라딘의 군대는 마른 풀에 불을 질러 연기로 적을 괴롭히고, 궁기병으로 지속적인 사격을 가하며 십자군을 소모시켰습니다. 결과는 예루살렘 왕국 군대의 완전한 궤멸이었습니다. 왕 기 드 뤼지냥이 포로로 잡혔고, 성십자가 유물이 노획되었으며, 왕국의 기사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투 후 살라딘의 행동은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포로가 된 기 드 뤼지냥 왕에게 차가운 물을 제공했고, 왕은 이를 마신 뒤 르노 드 샤티용에게 넘겼습니다. 살라딘은 “내가 이 물을 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아랍의 전통에서 음식이나 물을 직접 준 포로는 해치지 않는다는 관습을 지키면서도, 르노에 대한 처벌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습니다. 살라딘은 르노 드 샤티용을 직접 처형했습니다. 르노는 수년간 무슬림 순례 대상(隊商)을 약탈하고, 메카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며, 무함마드를 모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 드 뤼지냥 왕을 포함한 대부분의 귀족 포로들은 석방되었습니다. 일반 병사 포로들 중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기사들은 처형되었지만, 이는 이 두 기사단이 이슬람에 대한 타협 없는 적대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탈환(1187년 10월 2일) — 88년 만의 귀환
하틴 전투 후 3개월 만에, 살라딘은 해안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며 예루살렘 앞에 도달했습니다. 1187년 9월 20일부터 시작된 포위전은 약 2주 만에 항복 협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살라딘의 행동과 88년 전 1차 십자군의 행동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자행한 무차별 학살과 달리, 살라딘은 체계적이고 인도적인 항복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 프랑크인 주민은 몸값을 지불하고 안전하게 퇴거할 수 있었습니다. 남성 10디나르, 여성 5디나르, 어린이 1디나르.
-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시민들에 대해 살라딘은 상당수를 자비로 석방했습니다. 그의 동생 알-아딜도 수천 명의 석방을 자비 차원에서 요청하여 허락받았습니다.
- 동방 기독교인들은 도시에 잔류하여 종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 약탈과 학살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살라딘의 군대는 놀라울 정도로 질서 있게 도시에 입성했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사료들은 이 사건을 살라딘의 관용과 이슬람적 정의의 구현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이맘 알-이스파하니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도시에 입성한 후 알-아크사 모스크를 정화하고, 바위의 돔에 올라가 기도한 후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는 누르 앗-딘이 미리 제작해둔 민바르를 알-아크사 모스크에 설치하게 했는데, 이 민바르는 안타깝게도 1969년 호주인 극단주의자의 방화로 소실되었습니다.
서유럽의 기록에서도 살라딘의 관용은 인정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살라딘은 서유럽에서도 기사도의 모범으로 존경받게 되었고, 단테는 신곡에서 살라딘을 지옥의 림보(변방)에 배치하여, 비기독교인이면서도 고귀한 영혼으로 인정했습니다.
7. 3차 십자군(1189~1192) — 사자심왕과 살라딘의 대결
아카 공방전(1189~1191)
예루살렘 상실의 충격으로 서유럽은 3차 십자군을 조직했습니다. 이번에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사자심왕),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라는 세 명의 왕이 참여하는 대규모 원정이었습니다. 바르바로사가 아나톨리아에서 익사하는 사고로 독일군이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리처드와 필리프의 군대는 1191년 여름 해안 도시 아카(아크레)에 도착했습니다.
아카 공방전은 약 2년간 이어진 중세 최대 규모의 포위전 중 하나였습니다. 살라딘은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포위군을 역포위하는 형태로 주변에 진을 쳤지만, 바다를 통한 십자군의 보급을 차단할 수 없었습니다. 1191년 7월 아카는 결국 함락되었습니다.
아카 함락 후 벌어진 사건은 살라딘의 관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리처드는 항복 조건으로 살라딘에게 몸값과 포로 교환을 요구했는데, 살라딘이 기한 내에 조건을 이행하지 못하자(혹은 이행을 지연시키자), 약 2,700명의 무슬림 포로를 성벽 앞에서 학살했습니다.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랍 사료에서 특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리처드의 ‘기사도’에 대한 서유럽의 낭만적 서사와 크게 충돌합니다.
아르수프 전투와 외교적 해결
1191년 9월의 아르수프 전투에서 리처드는 살라딘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두 번이나 예루살렘 근처까지 진군했다가 철수해야 했습니다. 아랍 사료에 따르면, 리처드는 한 번은 예루살렘이 보이는 언덕에 올랐다가 방패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시를 탈환할 수 없다면 보지도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1192년 9월, 리처드와 살라딘은 야파 협정(알-라믈라 화약)을 체결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 예루살렘은 무슬림이 보유하되, 기독교 순례자의 자유로운 방문을 보장.
- 해안 도시 아카에서 야파까지는 십자군이 보유.
- 3년간의 휴전.
흥미롭게도, 협상 과정에서 리처드와 살라딘은 직접 만나지 않았지만 상호 존중을 보였습니다.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딘이 주치의를 보내고 과일과 눈을 보내 열을 식히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또한 리처드는 자신의 여동생 조안과 살라딘의 동생 알-아딜의 결혼을 제안하여 예루살렘을 공동 통치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는데, 이는 양측 모두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무산되었습니다.
살라딘은 야파 협정 체결 후 불과 5개월 뒤인 1193년 3월 4일,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습니다. 55세였습니다. 그의 재산은 금화 한 닢과 은화 몇 개가 전부였다고 전해집니다. 장례비조차 빌려야 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술탄 중 한 명이, 자선과 관대함으로 모든 재산을 써버린 것입니다.
8. 이후의 십자군들 — 목적의 변질
4차 십자군(1202~1204) — 동료 기독교인을 약탈하다
중동의 관점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4차 십자군입니다.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출발한 이 원정은 방향을 완전히 틀어,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습니다(1204년). 아랍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냉소적인 어조를 감추지 않습니다.
이븐 알-아시르는 기록합니다: “프랑크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무슬림을 공격하러 온 것처럼 기독교인을 약탈했다.”
4차 십자군은 무슬림에게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십자군 운동의 본질이 종교적 이상에서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로 완전히 변질되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이 약탈에서 결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이는 장기적으로 오스만 튀르크의 콘스탄티노플 정복(1453년)으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5차 십자군과 다미에타(1217~1221)
5차 십자군은 전략을 바꿔 이집트를 직접 공격했습니다. 1219년 나일 삼각주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를 점령한 후,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카밀은 놀라운 제안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대부분을 반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 사절 펠라지우스가 이끄는 십자군 지도부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카이로 진격을 시도했다가, 나일강의 범람에 갇혀 참패했습니다.
아랍 사료는 알-카밀의 평화 제안을 거부한 십자군의 오만을 비판하면서도, 알-카밀이 예루살렘을 너무 쉽게 내주려 했다는 비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지를 놓고 벌이는 이 전쟁에서, 양측 모두 내부의 분열과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6차 십자군(1228~1229) — 전투 없는 예루살렘 반환
가장 이례적인 것은 6차 십자군입니다. 교황에게 파문당한 상태에서 원정을 떠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카밀과 외교 협상만으로 예루살렘을 넘겨받았습니다(1229년). 전투 한 번 없이 달성된 이 ‘평화적 해결’은 양측 모두에서 극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무슬림 세계에서 알-카밀은 “프랑크인에게 알-쿠드스를 넘겨준 배신자”로 비난받았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설교자들은 공개적으로 그를 규탄했고, 바그다드의 칼리프궁에서는 항의의 애도식이 열렸습니다. 반면 서유럽에서도 프리드리히는 파문당한 이단자가 교황의 권위 없이 협상을 진행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랍어를 구사하고 이슬람 문화에 깊은 조예가 있는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알-카밀과의 서신 교환에서 그는 철학과 과학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알-카밀은 이슬람 학자들을 동원하여 답변을 제공했습니다. 이 두 지도자의 관계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거대한 충돌 속에서도 지적 교류와 상호 존중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244년 호라즘 출신의 튀르크 용병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이후 예루살렘은 다시는 십자군의 손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9. 바이바르스와 십자군 국가의 종말
몽골의 위협과 아인 잘루트 전투(1260)
13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보다 훨씬 더 큰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몽골의 침입입니다. 1258년 훌라구 칸이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아바스 칼리프를 처형하면서, 이슬람 문명의 심장이 파괴되었습니다. 몽골군은 시리아로 진격하여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습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이슬람 세계를 구한 것은 이집트의 맘루크(노예 출신 군인) 왕조였습니다. 1260년 9월 3일, 맘루크 술탄 쿠투즈와 그의 장군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의 아인 잘루트(골리앗의 샘)에서 몽골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전투는 몽골의 서진을 저지한 결정적 전환점으로, 중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인 잘루트로 가는 길에서 맘루크 군대가 십자군 국가인 아카를 통과했다는 점입니다. 아카의 십자군은 맘루크에게 통행을 허용했는데, 이는 몽골이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사실상 협력한 사례였습니다.
바이바르스(1260~1277) — 체계적 파괴자
아인 잘루트 전투 직후 쿠투즈를 암살하고 술탄이 된 바이바르스(الظاهر بيبرس)는, 살라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십자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살라딘이 관용과 기사도로 기억된다면, 바이바르스는 냉철한 효율성과 무자비함으로 기억됩니다.
바이바르스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십자군 국가를 체계적으로 해체하되, 그들의 거점을 재사용할 수 없도록 완전히 파괴한다. 그는 1265년 카이사리아와 아르수프를, 1266년 사파드를, 1268년 야파와 안티오키아를 차례로 함락시켰습니다.
안티오키아 함락(1268년)은 특히 가혹했습니다. 바이바르스는 원정 중이던 안티오키아 공 보에몽 6세에게 편지를 보내, 도시에서 벌어진 일을 상세히 묘사했습니다. 이 편지는 심리전의 걸작이자 잔인한 조롱의 기록입니다:
“그대가 만약 자신의 도시를 보았더라면 — 기둥과 문이 평탄해진 것을, 적이 아닌 불길이 들어온 것을, 교회가 파괴되고 십자가가 꺾인 것을, 쿠란의 페이지가 복음서의 페이지 위에 펼쳐진 것을… 그대는 소망했을 것이다, 차라리 죽은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바이바르스의 방식은 잔인했지만, 군사적으로는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몽골의 재침입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십자군을 압박하는 양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킬리키아 왕국(십자군의 동맹)을 공격하고, 이스마일파(암살단)의 산성들을 점령했으며, 누비아까지 원정을 보내는 등 전방위적 군사 활동을 벌였습니다.
아카의 함락(1291년) — 200년 전쟁의 종결
바이바르스 이후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칼라운과 그의 아들 알-아슈라프 칼릴이 마무리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1289년 트리폴리가 함락되었고, 1291년 5월 18일 최후의 대규모 십자군 거점 아카(아크레)가 함락되었습니다.
아카 공방전은 대규모 공성전이었습니다. 알-아슈라프 칼릴은 이집트와 시리아 전역에서 병력을 동원했고, 거대한 투석기들이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최후의 전투에서 성전기사단 본부가 무너지며 수백 명의 기사단원과 공격군이 함께 매몰되었습니다.
아카 함락 후, 맘루크는 남은 해안 거점들 — 시돈, 베이루트, 하이파 등 — 을 신속하게 점령했습니다. 이들은 도시들을 단순히 점령한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파괴했습니다. 해안 성채와 항구 시설을 완전히 허물어, 서유럽이 다시 상륙 거점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이로써 1096년에 시작된 약 200년간의 십자군 시대가 레반트에서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10. 십자군 전쟁의 유산 — 중동의 시각
문화적 교류와 기술 전파
200년간의 접촉은 군사적 충돌만이 아니라, 의미 있는 문화적 교류를 낳았습니다. 그 영향은 주로 이슬람 세계에서 서유럽으로 흐르는 방향이었습니다:
- 의학과 약학: 22화에서 다룬 이슬람 의학 전통이 십자군을 통해 서유럽에 전파되었습니다. 아랍 의학서의 라틴어 번역이 활발해졌습니다.
- 군사 건축: 이슬람의 성채 건축 기술이 서유럽 성곽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심원적 성벽, 마치쿨레이션(치장벽) 등의 기술이 전파되었습니다.
- 농업과 식품: 사탕수수, 면화, 향신료, 살구(apricot — 아랍어 알-바르쿠크에서 유래), 레몬 등이 십자군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었습니다.
- 직물과 공예: 다마스쿠스의 다마스크(damask) 직물, 모술의 무슬린(muslin), 가자의 거즈(gauze) — 이 모든 직물 명칭이 중동 도시에서 유래합니다.
- 상업과 금융: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이 십자군 물류를 담당하며 국제 무역의 중심으로 부상했고, 이슬람의 상업 기술(환어음, 합자 회사 등)을 도입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 미친 영향
반면 십자군이 이슬람 세계에 미친 문화적 영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이슬람 문명이 서유럽 문명보다 전반적으로 더 발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이 있었습니다:
- 정치적 통합의 촉매: 십자군이라는 외부 위협은 장기, 누르 앗-딘, 살라딘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통합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 지하드 이념의 부활: 초기 이슬람의 정복 시대 이후 약화되었던 군사적 지하드 개념이, 십자군 대응 과정에서 다시 강력한 정치적 도구로 부활했습니다.
- 수니파 정통성의 강화: 누르 앗-딘과 살라딘의 시대를 거치며, 수니파 마드라사 교육 체계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 타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 프랑크인과의 장기적 접촉은 이슬람 세계의 유럽 인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후대의 대외 관계에도 반영되었습니다.
기억의 정치학 — 십자군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가장 흥미로운 것은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기억과 해석이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십자군 전쟁은 오늘날만큼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13세기 이후 아랍·무슬림 역사가들에게 십자군은 몽골 침입에 비하면 부차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258년 바그다드의 멸망은 이슬람 문명에 훨씬 더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아랍·무슬림 세계에서 현대적 의미의 핵심 역사 서사로 부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19~20세기 유럽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경험이,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기억을 재활성화시켰습니다. 프랑스가 시리아와 레바논을 위임통치할 때, 앙리 구로 장군이 1920년 다마스쿠스에 입성하면서 살라딘의 무덤 앞에서 “살라딘이여, 우리가 돌아왔다(Saladin, nous sommes revenus)”라고 말했다는 유명한(그러나 진위가 논쟁되는) 일화는, 식민주의자들 스스로가 십자군과의 연속성을 주장한 사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중동에서 ‘십자군’이라는 용어는 단순한 역사적 지칭을 넘어, 서구의 군사적 개입과 문화적 침투를 상징하는 정치적 언어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의 정치적 활용은 중동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마무리 — 역사는 누구의 눈으로 읽느냐에 달렸다
십자군 전쟁은 같은 사건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서유럽의 서사에서 이 전쟁은 ‘성지를 지키기 위한 신앙의 전쟁’이었지만, 중동의 서사에서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에 침입한 야만적 외래 세력과의 투쟁’이었습니다. 두 서사 모두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으며, 두 서사 모두 정치적 목적으로 과장되고 왜곡되어 왔습니다.
팩트에 기반한 역사적 고찰이 보여주는 것은, 십자군 전쟁이 단순한 종교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야심, 경제적 이해, 문화적 접촉, 인간적 만남이 복합적으로 얽힌 거대한 역사적 과정이었다는 점입니다. 살라딘의 관용과 리처드의 학살, 우사마의 문화적 관찰과 바이바르스의 냉혹한 효율성, 프리드리히와 알-카밀의 지적 교류 — 이 모든 것이 200년 역사의 단면들입니다.
다음 27화에서는 십자군 시대와 겹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던 사건, 몽골의 침입과 1258년 바그다드의 멸망을 다룹니다. 이슬람 문명의 심장이 어떻게 파괴되었고, 그 충격이 중동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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