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역사] 17/52화: 수니파와 시아파: 카르발라 비극이 만든 이슬람 1400년 분열
정통 칼리프 시대 이후, 이슬람 공동체에 드리운 균열
지난 16화에서 우리는 정통 칼리프 시대(라시둔)의 폭발적 확장을 살펴보았습니다. 불과 30년 만에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까지 뻗어나간 이슬람 공동체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지만, 동시에 그 내부에는 깊은 균열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칼리프 우스만의 암살, 네 번째 칼리프 알리와 무아위야 사이의 내전—이 모든 갈등은 결국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카르발라 전투로 귀결됩니다.
카르발라의 비극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이슬람 세계를 수니파와 시아파로 영구히 갈라놓은 분수령이며, 오늘날까지 중동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이번 17화에서는 이 분열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카르발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그것이 왜 1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백만 명의 가슴에 살아 있는 상처인지를 팩트에 기반하여 깊이 있게 들여다보겠습니다.
분열의 씨앗: 후계 문제의 본질
예언자의 죽음과 첫 번째 갈림길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슬람 공동체(움마)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무함마드는 신의 마지막 예언자였기에 또 다른 예언자가 뒤를 이을 수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공동체를 이끌 것인가’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가 충돌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공동체의 원로들이 합의(슈라)를 통해 가장 적합한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무함마드의 가문, 특히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정당한 후계자라고 믿었습니다.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러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생전에 가디르 쿰(Ghadir Khumm)이라는 장소에서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내가 그의 주인(마울라)인 자에게, 알리도 그의 주인이다”라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이 ‘마울라’라는 아랍어 단어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후계자’라는 뜻인지, 단순히 ‘친구’ 혹은 ‘후원자’라는 뜻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칼리프 계승의 전개
결과적으로 첫 번째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절친한 동료이자 장인인 아부 바크르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우마르, 우스만이 차례로 칼리프직을 계승했습니다. 알리의 지지자들은 이 세 칼리프의 시대 동안 알리가 부당하게 배제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알리 자신은 공동체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들의 통치를 받아들였습니다.
656년, 세 번째 칼리프 우스만이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후 알리가 마침내 네 번째 칼리프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우스만의 친족이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우스만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며 알리의 정당성에 도전했습니다.

피트나: 이슬람 최초의 내전
낙타 전투(656년)
알리가 칼리프가 된 직후, 예언자의 아내 아이샤와 두 명의 원로 동료 탈하와 주바이르가 알리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우스만 살해범의 처벌을 요구했고, 알리가 이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656년 12월, 이라크 바스라 근처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아이샤가 낙타 위의 가마에서 전투를 지휘했기 때문에 ‘낙타 전투'(자말 전투)라 불립니다.
알리의 군대가 승리했고, 탈하와 주바이르는 전사했습니다. 아이샤는 포로가 되었지만 알리는 그녀를 정중히 대우하며 메디나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전투는 무슬림이 무슬림과 맞서 싸운 최초의 대규모 내전이라는 점에서 이슬람 공동체에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시핀 전투와 중재의 비극(657년)
더 큰 위협은 시리아의 무아위야였습니다. 657년,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계인 시핀(오늘날 시리아 라까 근처)에서 알리의 군대와 무아위야의 군대가 격돌했습니다. 전투는 수일간 이어졌고, 알리의 군대가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무아위야의 참모 아므르 이븐 알아스는 기발한 책략을 썼습니다. 그는 병사들에게 창끝에 쿠란의 사본을 매달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사이를 판단하게 하자”는 의미였습니다. 이 극적인 장면 앞에서 알리의 병사 상당수가 전투를 멈추고 중재(타흐킴)를 요구했습니다.
알리는 이 제안이 무아위야의 전술적 속임수임을 간파했지만, 자신의 군대 내부 압력에 굴복하여 중재에 동의했습니다. 이 중재의 결과는 사실상 무아위야에게 유리하게 흘러갔고, 알리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하와리즈파의 이탈과 알리의 암살
중재에 동의한 알리의 결정에 분노한 일부 지지자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와리즈파(이탈자들)입니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알리와 무아위야 모두를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와리즈파는 이슬람 역사 최초의 종파적 분리주의 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661년, 하와리즈파 소속의 이븐 물잠이 쿠파의 모스크에서 아침 예배를 드리던 알리를 독이 묻은 칼로 공격했습니다. 알리는 이틀 후 숨을 거두었고, 이로써 정통 칼리프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알리는 자신을 암살한 자에게도 공정한 대우를 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우마이야 왕조의 수립과 하산의 양보
무아위야의 권력 장악
알리의 사후, 그의 장남 하산 이븐 알리가 쿠파에서 칼리프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산은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미 무아위야가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라크의 군대는 분열과 사기 저하로 신뢰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산은 몇 가지 조건을 붙여 무아위야에게 칼리프직을 양도했습니다. 핵심 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무아위야 사후에는 칼리프직이 세습되지 않고 무슬림 공동체의 합의로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는 것. 둘째, 알리의 가문과 지지자들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661년,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아 우마이야 왕조를 공식적으로 수립했습니다. 이로써 칼리프제는 선출제에서 사실상 세습 왕조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시아파는 이를 이슬람 정치 원리에 대한 중대한 배신으로 보았습니다.
하산의 죽음
하산은 메디나에서 조용히 은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670년(일부 사료에서는 669년), 하산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아파 전승에서는 하산이 무아위야의 사주를 받은 자신의 아내 자아다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수니파 사료에서는 이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산의 죽음으로 알리 가문의 입지가 더욱 위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카르발라로 가는 길: 야지드의 즉위와 후사인의 결단
무아위야의 약속 파기
680년, 무아위야가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산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미 생전에 자신의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로 지명해두었습니다. 야지드 이븐 무아위야의 즉위는 여러 면에서 논쟁적이었습니다.
우선 세습 자체가 이슬람의 정치적 이상과 맞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야지드는 경건함이나 지도력보다는 사냥과 향락을 즐기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물론 우마이야 왕조 측의 사료에서는 야지드를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당대 많은 무슬림이 그의 자질에 의문을 품은 것은 사실입니다.
야지드는 즉위하자마자 제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충성 서약(바이아)을 요구했습니다. 대부분은 현실적으로 이에 응했지만, 몇몇 핵심 인물들은 거부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알리의 차남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인 후사인 이븐 알리였습니다.
후사인의 결의
후사인은 메디나에서 야지드의 충성 서약 요구를 받았을 때, 이를 거부하고 메카로 피신했습니다. 그의 거부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후사인에게 야지드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의 근본 원리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후사인은 후대에 전해지는 발언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야지드 같은 사람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는다.” 이 한마디에는 단순한 개인적 자존심이 아니라, 이슬람 지도자의 도덕적 자격에 대한 원칙적 입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편 이라크 쿠파에서는 알리 가문에 대한 향수와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수많은 편지가 후사인에게 도착했습니다. 쿠파의 시민들은 후사인이 오면 자신들이 그를 칼리프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 편지의 수가 수백 통에서 수천 통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무슬림 이븐 아킬의 파견
후사인은 쿠파 주민들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사촌 무슬림 이븐 아킬을 특사로 파견했습니다. 무슬림이 쿠파에 도착했을 때, 초기에는 수천 명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습니다. 상황이 유리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야지드는 즉각 대응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쿠파 총독을 해임하고, 냉혹하기로 소문난 우바이둘라 이븐 지야드를 새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븐 지야드는 쿠파에 도착하자마자 공포 정치를 펼쳤습니다. 부족장들을 위협하고 회유하며, 후사인 지지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포 앞에서 쿠파 시민들은 급속히 후사인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수천 명이 서약했던 충성은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무슬림 이븐 아킬은 고립된 채 체포되었고, 쿠파 총독부의 성벽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후사인에게 쿠파로 오지 말라는 경고를 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사인의 출발
비극적이게도 후사인은 무슬림의 죽음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메카를 떠나 쿠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680년 9월(이슬람력 61년 주 알히자 8일), 후사인은 약 72명의 전투원과 여성·어린이를 포함한 일행과 함께 메카를 출발했습니다.
일부 동료와 친지들은 후사인에게 이 여정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메카의 원로 압둘라 이븐 압바스는 “쿠파인들은 아버지(알리)와 형(하산)도 배신한 자들”이라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후사인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단순히 권력을 잡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일어서야 하는 도덕적 의무였습니다.
카르발라 전투: 680년 10월 10일(무하람 10일)
포위와 단수
후사인의 일행이 이라크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도중에 무슬림 이븐 아킬의 처형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후사인은 일행에게 돌아갈 자유를 주었고, 일부는 실제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핵심 가족과 충실한 동료들은 남았습니다.
680년 10월 2일(무하람 2일), 후사인의 일행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카르발라 평원에서 우마이야 군대와 조우했습니다. 이븐 지야드가 파견한 군대는 후르 이븐 야지드 알리야히가 지휘하는 약 1,000명의 기병대였습니다. 후르는 후사인에게 쿠파로의 진군을 막되, 즉각적인 공격은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우마르 이븐 사아드가 이끄는 약 4,000명 규모의 본대가 도착했습니다(일부 사료에서는 최종적으로 수천에서 3만 명까지 증원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들은 후사인의 진영을 완전히 포위하고, 결정적으로 유프라테스 강으로의 접근을 차단했습니다.
카르발라의 사막에서 물이 끊긴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후사인의 진영에는 전투원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아이, 심지어 생후 6개월 된 영아 알리 알아스가르까지 있었습니다. 갈증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협상의 실패
후사인은 세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첫째, 자신을 메디나로 돌아가게 해달라. 둘째, 변경의 전선으로 보내 지하드에 참여하게 해달라. 셋째, 야지드를 직접 만나 대화하게 해달라. 이 제안들 중 어느 것이라도 받아들여졌다면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현장 지휘관 우마르 이븐 사아드는 후사인의 제안에 일리가 있다고 보고 이를 쿠파의 이븐 지야드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이븐 지야드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후사인이 야지드에게 충성 서약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제압하라.” 협상의 여지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아슈라의 아침
680년 10월 10일, 이슬람력으로 무하람월 10일—아슈라—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날은 이미 이슬람 전통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을 기념하는 금식일이었습니다. 이제 이날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될 참이었습니다.
전투 전날 밤, 후사인은 동료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텐트의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떠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나뿐이다. 나를 찾으면 너희를 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한결같이 거부했습니다. 알리의 충실한 추종자 하비브 이븐 무자히르는 “당신 곁에서 천 번 죽었다 살아나더라도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역사적으로 놀라운 장면이 이 아침에 벌어졌습니다. 우마이야 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후르 이븐 야지드—바로 후사인을 처음 가로막았던 그 장수—가 진영을 이탈하여 후사인의 편에 합류한 것입니다. 후르는 후사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고, 후사인은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후르는 이날 후사인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첫 번째 순교자 중 하나가 됩니다.
전투의 전개
72명 대 수천 명.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전투는 아랍의 전쟁 관습에 따라 일대일 대결로 시작되었습니다. 후사인의 동료들은 한 명 한 명 나가 싸웠고, 한 명 한 명 쓰러졌습니다.
가장 가슴 아픈 장면들이 이어졌습니다. 후사인의 이복형제 아바스 이븐 알리는 진영의 아이들을 위해 물을 구하러 유프라테스 강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는 물주머니에 물을 채우는 데 성공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적군의 공격을 받아 양팔이 잘렸습니다. 그는 이빨로 물주머니를 물고 돌아오려 했지만, 결국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물주머니도 찢어졌습니다. 아바스는 단 한 모금의 물도 진영에 전달하지 못한 채 전사했습니다.
후사인의 18살 된 아들 알리 알아크바르도 전사했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그는 외모가 예언자 무함마드를 가장 닮았다고 전해지는 청년이었습니다. 후사인의 조카, 사촌, 충실한 동료들이 하나둘 쓰러져갔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화 중 하나는 후사인의 막내아들, 생후 6개월 된 알리 알아스가르에 관한 것입니다. 갈증으로 탈수 상태에 빠진 아기를 위해 후사인은 적진을 향해 아이를 들어 보이며 최소한 이 아이에게만이라도 물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돌아온 것은 화살이었습니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화살은 아기의 목을 관통했습니다.

후사인의 최후
동료와 가족이 모두 쓰러진 후, 후사인은 홀로 남았습니다. 그는 부상투성이의 몸으로 마지막까지 싸웠습니다. 사료들은 그의 몸에 수십 개의 상처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시무르 이븐 주 알자우샨이 최종적으로 후사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일부 사료에서는 여러 병사가 서로 먼저 후사인을 죽이려 경쟁했지만, 대부분은 예언자의 외손자를 직접 해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합니다.
후사인의 머리는 창끝에 꽂혀 쿠파로 보내졌고, 이후 다마스쿠스의 야지드 궁전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카르발라의 전장에서 남성 전투원은 거의 전멸했지만, 여성과 어린이들은 포로로 잡혀 쿠파와 다마스쿠스로 끌려갔습니다.
카르발라 이후: 포로의 행진과 야지드의 궁전
자이나브의 목소리
카르발라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가장 중요한 인물은 두 사람입니다. 하나는 후사인의 아들로서 병중이어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던 알리 이븐 후사인(후에 자인 알아비딘—’경배하는 자들의 장식’이라는 칭호를 받음)이고, 다른 하나는 후사인의 누이 자이나브 빈트 알리입니다.
자이나브는 카르발라 서사에서 후사인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입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적인 행진 중에도 그녀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쿠파의 총독 이븐 지야드 앞에서, 그리고 다마스쿠스의 야지드 궁전에서 자이나브는 놀라운 연설을 했습니다.
이븐 지야드가 승리를 자축하며 “하나님이 우리 편이었다”고 말하자, 자이나브는 이렇게 응수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이 죽인 것은 예언자의 후손이다. 두고 보라, 역사가 누구의 편인지를.” 야지드의 궁전에서도 그녀는 권력자 앞에서 굴하지 않고 카르발라의 진실을 증언했습니다.
자이나브의 증언은 카르발라의 기억이 소멸되지 않도록 한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모든 생존자가 침묵했다면, 우마이야 왕조는 이 사건을 단순한 ‘반란 진압’으로 기록하고 끝냈을 것입니다. 자이나브의 목소리 덕분에 카르발라는 ‘학살’이자 ‘순교’로 역사에 새겨졌습니다.
야지드의 반응
야지드가 카르발라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야지드는 후사인의 머리가 도착했을 때 기뻐하며 지팡이로 그 머리를 때렸다고 합니다. 다른 기록에서는 야지드가 이븐 지야드의 과잉 대응에 불쾌해하며 “이븐 지야드에게 저주가 있으라, 후사인이 나에게 왔더라면 용서했을 것을”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치적 현실은 분명했습니다. 카르발라의 학살은 우마이야 왕조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예언자의 외손자를 죽인 왕조라는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분열의 본질
정치적 분쟁에서 종파적 정체성으로
여기서 핵심적인 역사적 사실을 짚어야 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카르발라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뿌리는 무함마드 사후 첫 번째 후계자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카르발라는 이 분열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카르발라 이전의 ‘시아트 알리'(알리의 당파)는 주로 정치적 충성의 문제였습니다. 알리와 그 후손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이었을 뿐, 별도의 신학이나 의례 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카르발라 이후, 이 정치적 충성은 깊은 종교적·영적 정체성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사인의 순교는 단순한 정치적 패배가 아니라, 정의와 불의의 우주적 투쟁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여기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근본적 차이가 형성되었습니다.
수니파의 관점
수니파(순나 왈 자마아—예언자의 전통과 공동체의 사람들)는 칼리프제의 정당성을 공동체의 합의(이즈마)에 둡니다. 이 관점에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네 명 모두 정당한 칼리프였습니다. 수니파도 후사인의 죽음을 비극으로 인정하며, 야지드의 행위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별도의 종파적 정체성이나 신학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수니파에서 아슈라는 모세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금식일로서의 의미를 유지합니다. 후사인에 대한 존경은 있지만, 그것이 의례화된 애도(哀悼)로 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시아파의 관점
시아파(시아트 알리—알리의 당파)는 이맘직(이슬람 공동체의 영적·정치적 지도자)이 알리와 그 후손에게 신적으로 지정되었다고 믿습니다. 이 관점에서 아부 바크르부터 우마이야 왕조까지, 알리 가문의 권리를 빼앗은 모든 이들은 부당한 찬탈자입니다.
후사인의 순교는 시아파 신학과 영성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카르발라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정의가 불의에 맞서 싸우는 영원한 원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후사인은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의 패배 자체가 도덕적 승리라는 역설이 시아파 사상의 중심에 놓입니다.

아슈라와 추모 문화: 1400년간 이어진 기억
타지야와 마아탐
매년 이슬람력 무하람월이 돌아오면, 전 세계 시아파 무슬림은 카르발라의 비극을 추모합니다. 이 추모 의식은 시아파 문화의 가장 독특하고 강렬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타지야(추모 행렬)는 후사인의 장례 행렬을 재현하는 의식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참가자들이 후사인의 관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메고 거리를 행진합니다. 마아탐(애도 모임)에서는 후사인의 순교를 서술하는 비가(마르시야)가 낭송되며, 참가자들은 가슴을 치며(시나자니) 울부짖습니다.
가장 정교한 추모 형태는 타지야 연극입니다. 이란과 이라크에서 특히 발달한 이 종교극은 카르발라 전투의 주요 장면을 극화하여 재현합니다. 후사인, 자이나브, 아바스, 시무르 등의 역할을 배우들이 연기하며, 관객들은 깊은 감정적 참여를 통해 카르발라의 경험을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르바인은 후사인 순교 40일 후를 기념하는 날로,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이라크 카르발라의 후사인 사당을 방문합니다. 이 순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종교 행사 중 하나로, 매년 약 2,0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라크 각지에서 카르발라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서 순례하는 전통이 있으며, 순례 경로를 따라 무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자원봉사 천막(마우킵)이 줄지어 세워집니다.
카르발라의 현대적 의미
카르발라의 서사는 단순히 과거의 종교적 기억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서사는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정치적 저항의 상징으로 활용되었습니다.
1979년 이란 혁명에서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조를 야지드에, 이란 민중을 후사인에 비유하며 혁명의 정당성을 호소했습니다. “모든 곳이 카르발라이고, 매일이 아슈라이다”라는 구호는 혁명의 핵심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은 시아파 다수 인구를 억압했고, 아슈라 추모 행사를 금지하거나 제한했습니다. 2003년 사담 정권 붕괴 후 대규모 아슈라 행사가 재개되었을 때, 이것은 단순한 종교 의식의 부활이 아니라 정치적 해방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 역시 카르발라의 서사를 자신들의 저항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카르발라는 시아파 공동체가 억압이나 부정의에 직면할 때마다 소환되는 강력한 역사적 원형으로 기능합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본 카르발라의 의미
권력과 도덕의 충돌
카르발라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이것은 이슬람 정치사에서 두 가지 원리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현실 정치의 논리—질서와 안정을 위해서는 기존 권력을 인정해야 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원칙—정의롭지 못한 권력에는 복종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무아위야와 야지드는 전자의 논리를 대표합니다. 우마이야 왕조 지지자들의 관점에서, 후사인의 거부는 공동체의 통합을 위협하는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미 첫 번째 피트나(내전)의 참상을 경험한 이슬람 세계에서, 또 다른 분열은 막아야 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후사인은 후자의 원칙을 대표합니다. 그의 입장에서 야지드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은 이슬람의 근본 원리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리프는 공동체의 합의와 도덕적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단순히 무력이나 세습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판결
흥미롭게도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카르발라에서 후사인이 도덕적으로 옳았다는 데 대체로 동의합니다. 수니파의 주류 학자들도 야지드의 행위를 비난하며, 후사인을 높이 존경합니다. 차이는 이 사건에서 어떤 ‘교훈’을 이끌어내느냐에 있습니다.
수니파 전통에서 카르발라의 교훈은 ‘피트나(내전과 분열)의 위험성’입니다. 공동체의 통합이 최우선이며, 내부 분열은 어떤 명분이 있더라도 더 큰 해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시아파 전통에서 카르발라의 교훈은 ‘부정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의무’입니다. 수적으로 열세이고 패배가 확실하더라도, 정의를 위해 일어서는 것 자체가 승리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은 단순히 과거사에 대한 학술적 차이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중동 정치에서 권력의 정당성, 저항의 한계,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카르발라 이후의 여파: 연쇄적 반란
타우와분 운동(회개자들의 운동, 684년)
카르발라의 비극 이후, 쿠파의 시아파 지지자들 사이에서 깊은 죄책감이 퍼졌습니다. 후사인을 불러놓고 돕지 못한 자들, 두려움에 등을 돌린 자들이 회한에 시달렸습니다. 684년, 이들 중 일부가 ‘타우와분'(회개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봉기했습니다.
약 4,000명의 타우와분은 먼저 카르발라의 후사인 무덤을 방문하여 울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마이야 군대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이들은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속죄—후사인을 위해 싸우다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배신을 갚는 것이었습니다. 685년 아인 알와르다 전투에서 타우와분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이 운동은 군사적으로는 완전한 실패였지만, 시아파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카르발라에 대한 죄책감과 속죄의 열망은 시아파 종교 감수성의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무흐타르의 반란(685-687년)
타우와분보다 더 조직적이고 성공적인 반란은 무흐타르 알사카피가 이끌었습니다. 무흐타르는 쿠파에서 봉기하여 도시를 장악했고, 카르발라 학살의 실행자들을 추적하여 처벌했습니다. 후사인에게 마지막 타격을 가한 시무르를 비롯한 여러 가담자가 무흐타르의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무흐타르는 알리의 또 다른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를 이맘으로 내세웠습니다. 그의 운동은 특이하게도 아랍인뿐 아니라 개종한 비아랍 무슬림(마왈리)에게까지 평등한 지위를 약속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687년, 무흐타르는 바스라에서 온 군대에 패배하여 사망했습니다.
분열의 유산: 오늘날의 수니파와 시아파
카르발라에서 시작된 수니파-시아파 분열은 이후 수세기에 걸쳐 점차 신학적·법학적·의례적 차이로 확대되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약 19억 무슬림 중 수니파가 약 85~90%, 시아파가 약 10~15%를 차지합니다.
시아파가 다수를 이루는 국가는 이란,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이며, 레바논, 예멘, 쿠웨이트 등에도 상당한 시아파 인구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부 지방(석유 자원이 집중된 지역)에도 시아파 소수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지도자 계승: 수니파는 공동체의 합의로 칼리프를 선출해야 한다고 보며, 시아파는 이맘이 알리의 혈통에서 신적으로 지정된다고 봅니다.
- 이맘의 지위: 수니파에서 이맘은 예배를 이끄는 사람이지만, 시아파에서 이맘은 무류(無謬)한 영적 지도자입니다.
- 법학 체계: 수니파에는 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 네 대법학파가 있으며, 시아파(12이맘파)에는 자파리 법학파가 있습니다.
- 주요 성지: 메카와 메디나는 공유하지만, 시아파는 추가로 카르발라, 나자프(알리의 무덤), 마슈하드, 사마라 등을 중요 성지로 둡니다.
- 아슈라의 의미: 수니파에서는 모세의 출애굽 기념 금식일이며, 시아파에서는 후사인 순교 추모의 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의 근본 신앙—유일신(타우히드), 쿠란, 무함마드의 예언자직, 다섯 기둥(신앙 고백, 예배, 금식, 자선, 성지 순례)—을 공유합니다. 분열의 뿌리가 신학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카르발라가 남긴 물음
카르발라의 비극은 이슬람 역사의 한 장을 넘어, 인류 보편의 질문을 던집니다. 불의한 권력 앞에서 개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공동체의 안정과 정의의 실현이 충돌할 때, 무엇이 우선인가?
후사인은 72명의 동료와 함께 수천 명의 군대 앞에 섰습니다. 군사적으로 그는 졌습니다. 그러나 1400년이 지난 오늘날, 매년 수천만 명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카르발라의 사막으로 순례를 떠납니다. 반면 야지드의 이름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서—수니파든 시아파든—부정적인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역사는 때로 전장에서의 승자가 아닌, 도덕적 승자의 손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카르발라 평원에는 오늘날 거대한 사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황금 돔으로 빛나는 이맘 후사인 사당은 시아파 세계에서 메카와 메디나 다음으로 신성한 장소입니다.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이곳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1400년 전의 그 날을 기억합니다. 역사가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을 카르발라만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소는 드뭅니다.
다음 이야기를 향하여
카르발라의 비극은 이슬람 세계를 영구히 두 갈래로 나누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슬람 문명 자체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내부의 균열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제국을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랍어가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고, 독특한 이슬람 건축과 예술이 탄생했으며, 거대한 다민족·다종교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 체계가 구축되었습니다.
다음 18화에서는 바로 이 우마이야 왕조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보겠습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아 대제국을 건설한 우마이야 왕조는 어떻게 이슬람 세계의 판도를 바꾸었고, 동시에 어떤 내부 모순이 결국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는지—그 역동적인 역사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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