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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6/52화: 아시리아 제국: 고대 최강 군사 제국의 공포와 영광

아시리아 제국: 고대 최강 군사 제국의 공포와 영광

들어가며 — 철기 시대의 새로운 패자

지난 5화에서 우리는 히타이트 제국이 철기 기술의 선구자로서 고대 중동의 판도를 바꿨다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기원전 1200년경 ‘해양 민족’의 침입과 함께 히타이트가 갑작스레 무너진 이후, 중동에는 권력의 공백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이 혼란의 시기에 티그리스강 상류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세력이 역사상 유례없는 군사 제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 이름이 바로 아시리아(Assyria)입니다.

아시리아는 단순히 ‘잔인한 정복자’라는 이미지로만 기억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제국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고도로 조직화된 행정 체계, 놀라운 공학 기술, 그리고 인류 최초의 체계적 도서관까지 품고 있었던 복합적인 문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6화에서는 아시리아가 어떻게 고대 세계의 최강자가 되었으며, 왜 그토록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팩트에 기반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아시리아의 기원 — 티그리스강 상류의 도시국가

아시리아의 역사적 중심지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티그리스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도시 아수르(Ashur)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아시리아인들이 섬기던 최고신 아수르에서 유래했으며, 제국 자체의 이름도 이 도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화에서 다루었던 수메르 문명의 도시국가들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비옥한 충적 평야에서 번성했다면, 아시리아는 그보다 훨씬 북쪽의 구릉 지대에서 태동했습니다.

지리적 환경이 만든 전사 문화

아시리아가 자리 잡은 북부 메소포타미아는 남부와는 매우 다른 환경이었습니다. 강수량이 비교적 풍부하여 관개 없이도 농사가 가능했지만, 동시에 주변의 산악 민족들—자그로스 산맥의 부족들, 아나톨리아 고원의 세력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런 지정학적 환경은 아시리아인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아수르는 고대 근동의 주요 교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기원전 2000년대 초반, 아시리아 상인들은 아나톨리아의 카네시(Kanesh, 오늘날 터키의 퀼테페)까지 진출하여 주석과 직물을 거래하는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운영했습니다. 이 시기를 고(古)아시리아 시대(기원전 약 2025~1378년)라 부르며, 카네시에서 발견된 수만 점의 점토판 문서가 이 활발한 상업 활동을 증명합니다.

초기 아시리아의 정치 구조

고아시리아 시대의 아수르는 왕이 존재했지만, 그 권한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도시의 주요 결정은 ‘림무(limmu)’라 불리는 관직자들과 장로 회의가 함께 내렸습니다. 림무는 매년 추첨으로 선출되어 그 해의 이름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는 아시리아인들이 연도를 기록하는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일종의 과두정치에 가까웠으며, 왕은 ‘신의 대리인’이라는 종교적 권위를 가졌지만 세속적 권력은 상인 귀족층과 나누어야 했습니다.

이 시기의 아시리아는 아직 제국이라 부르기 어려웠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강대국들—3화에서 다루었던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조를 비롯하여—에 비하면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진정한 변화는 기원전 14세기부터 시작됩니다.

중(中)아시리아 시대 — 제국의 씨앗

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의 세력 확장과 미탄니 왕국의 약화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아시리아의 왕 아수르우발리트 1세(Ashur-uballit I, 재위 기원전 약 1363~1328년)가 등장합니다. 그는 미탄니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 아시리아를 독립 왕국으로 선언하고,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동등한 외교 서한을 보낼 정도로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렸습니다. 아마르나 서신(Tell el-Amarna letters)에서 그의 외교 문서가 발견되는데, 이는 4화에서 언급한 고대 이집트와 레반트 사이의 국제 외교 네트워크에 아시리아가 당당히 참여했음을 보여줍니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와 바빌론 정복

중아시리아 시대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투쿨티니누르타 1세(Tukulti-Ninurta I, 재위 기원전 약 1243~1207년)의 바빌론 정복입니다. 그는 카시트 왕조가 지배하던 바빌론을 공격하여 그 왕을 포로로 잡고, 메소포타미아 남부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것은 아시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바빌론을 정복한 사건이었으며,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반복될 아시리아-바빌론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또한 아수르 인근에 카르투쿨티니누르타(Kar-Tukulti-Ninurta)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는데, 이는 후대 아시리아 왕들이 반복적으로 새 수도를 건설하는 전통의 시초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기에 반란이 일어나 결국 자신의 아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시리아 내부 권력 투쟁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이기도 합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 — 첫 번째 정복왕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Tiglath-Pileser I, 재위 기원전 약 1114~1076년)는 중아시리아 시대 말기의 위대한 정복왕으로,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까지 원정을 감행하고, 북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남부를 공략했습니다. 그의 연대기에는 사자 사냥과 야생 황소 사냥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런 왕의 수렵 활동 기록은 후대 신아시리아 시대에 더욱 정교한 궁전 부조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원전 11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아람인(Arameans)의 대규모 이주와 침입이 발생하면서, 아시리아는 심각한 영토 축소를 겪게 됩니다. 이 ‘암흑기’는 약 두 세기가량 지속되었고, 아시리아는 다시 아수르 인근의 핵심 영토로 움츠러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련은 역설적으로 아시리아를 더욱 강인하게 단련시켰으며, 기원전 10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신(新)아시리아 제국의 폭발적 팽창을 위한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신아시리아 제국 — 고대 세계 최강의 군사 기계

기원전 10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7세기까지 이어진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은 고대 근동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의미의 ‘세계 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아시리아는 오늘날의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터키 남부, 이란 서부, 그리고 심지어 이집트까지 지배하며 고대 근동 전체를 하나의 정치 체제 아래 통합했습니다.

아수르나시르팔 2세 — 공포 정치의 설계자

신아시리아 제국의 본격적인 팽창은 아수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 재위 기원전 883~859년)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아시리아 군사력의 근간이 되는 상비군 체제를 확립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대폭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역사에 각인시킨 것은 정복 과정에서 보여준 극단적인 폭력과 그것의 체계적 기록입니다.

아수르나시르팔 2세의 연대기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등장합니다:

  • 반란을 일으킨 도시의 귀족들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으로 성벽을 장식했다.
  • 포로들의 코, 귀, 손가락을 자르고 눈을 뽑았다.
  • 정복한 도시의 소년소녀들을 불에 태웠다.
  • 반항한 수장들의 목을 베어 도시 광장에 높이 걸어두었다.

이러한 기록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끔찍하지만, 중요한 점은 아시리아 왕들이 이런 행위를 의도적으로 공개하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잔인함이 아니라 전략적 공포(strategic terror)였습니다. 반란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널리 알림으로써, 다른 도시와 민족들이 저항 대신 순순히 항복하도록 유도하는 심리전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님루드 — 새로운 제국의 수도

아수르나시르팔 2세는 고대 도시 칼후(Kalhu, 성경의 ‘칼라’, 오늘날의 님루드)를 대대적으로 재건하여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가 건설한 북서 궁전(Northwest Palace)은 고대 근동 건축의 걸작 중 하나로, 궁전 벽면을 따라 배치된 거대한 석판 부조에는 왕의 정복 장면, 사냥 장면, 그리고 신들에게 제의를 올리는 장면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궁전 입구를 지키는 라마수(Lamassu)—사람의 머리에 날개 달린 황소 또는 사자의 몸을 가진 수호상—는 아시리아 예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조각상은 높이가 3~5미터에 달했으며, 정면에서 보면 정지해 있고 측면에서 보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다리를 다섯 개로 조각하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님루드 궁전의 낙성식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데, 아수르나시르팔 2세는 무려 69,574명의 하객을 초대하여 10일간의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소 1,000마리, 양 14,000마리, 오리 10,000마리 등이 소비되었으며, 이 기록은 왕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살만에세르 3세와 카르카르 전투

아수르나시르팔 2세의 아들 살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 재위 기원전 858~824년)는 아버지의 팽창 정책을 이어받아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했습니다. 기원전 853년, 그는 오론테스강 인근의 카르카르(Qarqar)에서 다마스쿠스의 하다드에제르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이끄는 12개국 연합군과 대전투를 벌입니다.

살만에세르 3세의 쿠르크 비문(Kurkh Monolith)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아합은 2,000대의 전차와 10,000명의 보병을 제공했는데, 이는 연합군 중에서도 가장 큰 전차 부대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서진을 멈추고 돌아갔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아시리아가 지중해 세계의 정치 구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살만에세르 3세의 또 다른 유명한 유물은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로, 여기에는 이스라엘 왕 예후(Jehu)가 아시리아 왕 앞에 엎드려 조공을 바치는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왕이 현존하는 고대 유물에 시각적으로 묘사된 유일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아시리아 군사 기술의 혁신

아시리아가 고대 세계의 최강자가 된 배경에는 끊임없는 군사 기술 혁신이 있었습니다. 아시리아 군대는 단순히 숫자가 많았던 것이 아니라, 고대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기술적으로 진보한 전투 기계였습니다.

철제 무기의 대량 보급

5화에서 히타이트가 철기 기술의 선구자였다고 다루었는데, 히타이트 멸망 이후 철 제련 기술이 근동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아시리아는 이 기술을 군사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국가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정복한 지역의 대장장이들을 제국의 중심부로 이주시켜 대규모 무기 생산 시설을 운영했습니다. 님루드의 포트살만에세르(Fort Shalmaneser) 유적에서는 수톤에 달하는 철제 무기와 갑옷 조각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아시리아의 산업적 규모의 무기 생산 능력을 증명합니다.

병과의 분화와 전문화

아시리아 군대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게 병과가 분화된 군대였습니다:

  • 중보병(Heavy Infantry): 긴 창과 대형 방패를 장비한 밀집대형의 핵심. 금속 갑옷과 철제 투구로 무장했습니다.
  • 궁병(Archers): 아시리아 군대의 상징적 병과. 복합궁(composite bow)을 사용하여 먼 거리에서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궁전 부조에서 가장 많이 묘사되는 병과이기도 합니다.
  • 전차병(Chariotry): 초기에는 2인승이었으나 점차 4인승까지 대형화되었습니다. 전차에는 어자(御者), 궁수, 그리고 방패 지병이 탑승했습니다.
  • 기병(Cavalry):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에서 기마 전투 기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최초의 국가 중 하나입니다. 초기에는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명이 말을 조종하고 다른 한 명이 활을 쏘는 방식이었으나, 후기에는 한 명이 혼자 말을 타면서 활을 쏘거나 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공병(Siege Engineers): 아시리아의 공성 기술은 고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문 장비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 투석병(Slingers): 원거리 지원 사격을 담당하며 궁병과 함께 운용되었습니다.

공성전의 대가

아시리아의 군사적 우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는 공성전(siege warfare)입니다. 고대 도시들은 높고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공성 기술이 없으면 정복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아시리아는 이 분야에서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 공성 파성퇴(Battering Ram): 아시리아의 파성퇴는 이전 시대의 단순한 통나무가 아니었습니다. 지붕이 달린 이동식 구조물 안에 금속으로 강화된 충각(衝角)이 설치되어 있었고,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과 끓는 기름으로부터 조작원을 보호했습니다. 궁전 부조에는 파성퇴 위에서 물을 부어 불화살에 대응하는 장면까지 묘사되어 있습니다.
  • 공성 경사로(Siege Ramp): 성벽 높이까지 흙과 돌을 쌓아 올려 경사로를 만들고, 이 위로 파성퇴를 끌어올리는 기법입니다. 이스라엘 라키시(Lachish) 유적에서 발견된 아시리아의 공성 경사로 잔해는 이 기법의 실체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입니다.
  • 갱도 굴착(Undermining): 성벽 아래로 터널을 파서 기초를 약화시키는 기법입니다.
  • 공성탑(Siege Tower): 성벽 높이에 맞춘 이동식 탑을 만들어 궁수들이 성벽 위의 수비군과 동일한 높이에서 사격할 수 있게 했습니다.

군사 조직과 보급 체계

아시리아 군대의 진정한 강점은 개별 무기나 전술보다 조직과 보급 체계에 있었습니다. 아시리아는 제국 전역에 왕의 도로(Royal Road)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군대의 신속한 이동과 보급품 수송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 도로망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역참(驛站)이 설치되어 정보 전달과 보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아시리아는 정복한 민족들의 군사 기술을 적극적으로 흡수했습니다. 스키타이의 기마 전술, 레반트의 전차 기술, 산악 민족의 게릴라 전술 등을 자국 군대에 통합하는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이 수 세기 뒤에 보여줄 군사적 적응력의 선례라 할 수 있습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 제국 시스템의 완성자

아시리아 제국의 진정한 전환점은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기원전 745~727년)의 등장입니다. 그는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으며, 아시리아를 단순한 약탈 국가에서 체계적인 제국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속주 체제의 확립

이전의 아시리아 왕들은 정복한 지역에 조공을 부과하되, 현지 통치자를 유지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아시리아 군대가 물러나면 반란이 반복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이를 근본적으로 바꿨습니다.

그는 정복한 지역을 속주(province)로 재편하고, 아시리아인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는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각 속주는 세금 징수, 군역 의무, 그리고 부역 노동 등의 의무를 부담했으며, 총독은 정기적으로 중앙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이 관료제적 통치 시스템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것 중 하나였으며, 후대의 페르시아 제국 행정 체계의 직접적인 선례가 되었습니다.

강제 이주 정책 — 뿌리 뽑기 전략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도입한 가장 악명 높은 정책은 대규모 강제 이주(deportation)입니다.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본래의 터전에서 뽑아내어 제국의 완전히 다른 지역에 재정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책의 목적은 다층적이었습니다:

  • 반란 방지: 토착 공동체를 해체하여 집단적 저항의 기반을 없앴습니다. 낯선 땅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이웃들 사이에 흩어진 사람들은 조직적 반란을 일으키기 어려웠습니다.
  • 노동력 재배치: 인구가 부족한 지역이나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에 노동력을 공급했습니다.
  • 문화적 동화: 장기적으로 피정복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아시리아 제국의 신민으로 동화되도록 유도했습니다.

아시리아 기록에 따르면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이 강제 이주 정책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 북왕국의 멸망 후 이루어진 이스라엘인들의 강제 이주로, 이른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0지파’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이 됩니다. 반대로, 다른 지역의 주민들이 옛 이스라엘 땅에 정착하면서 후대의 ‘사마리아인’ 공동체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상비군의 전문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군사 개혁도 단행했습니다. 기존의 징집 위주 군대에서 직업군인 중심의 상비군으로 전환하고, 정복한 민족들로부터 병력을 충원하여 다민족 군대를 구성했습니다. 이를 통해 아시리아는 농경 시즌에 관계없이 연중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군대의 전문성과 전투력도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사르곤 왕조 — 제국의 절정기

기원전 722년, 사르곤 2세(Sargon II, 재위 기원전 722~705년)가 왕위에 오르면서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이자 가장 화려한 왕조가 시작됩니다. 사르곤 왕조의 네 왕—사르곤 2세, 산헤립, 에사르하돈, 아수르바니팔—의 시기는 아시리아가 절대적 전성기를 구가하면서도 동시에 붕괴의 씨앗을 잉태한 시기였습니다.

사르곤 2세와 두르샤루킨

사르곤 2세는 이스라엘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 이스라엘을 아시리아의 속주로 병합한 왕으로,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는 두르샤루킨(Dur-Sharrukin, ‘사르곤의 요새’라는 뜻, 오늘날의 코르사바드)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수도의 건설이었습니다.

두르샤루킨은 약 3km²의 면적에 걸쳐 계획적으로 설계된 도시로, 거대한 왕궁과 신전들이 인공 기단 위에 세워졌습니다. 궁전에는 무게가 40톤에 달하는 라마수 조각상이 배치되었으며, 벽면에는 정복 전쟁의 장면들이 정교하게 새겨진 석판 부조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르곤 2세가 기원전 705년 전투 중 전사하자, 그의 후계자 산헤립은 아버지의 도시를 버리고 니느웨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두르샤루킨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려진 비운의 도시가 된 것입니다.

산헤립과 니느웨의 영광

산헤립(Sennacherib, 재위 기원전 705~681년)은 아시리아의 수도를 니느웨(Nineveh)로 옮기고, 이 도시를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도시 중 하나로 변모시켰습니다. 그가 건설한 ‘비할 데 없는 궁전(Palace Without Rival)’은 80개가 넘는 방을 가진 거대한 건축물로, 약 3,000미터에 달하는 석판 부조가 벽면을 장식했습니다.

산헤립은 또한 대규모 토목 공사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니느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약 50km 길이의 수로(aqueduct)를 건설했는데, 이 중 제르완(Jerwan) 수로교는 길이 280미터, 높이 9미터에 달하는 석조 구조물로, 로마의 유명한 수도교보다 수 세기 앞선 것이었습니다. 이 수로는 200만 개가 넘는 석재 블록을 사용하여 건설되었으며, 방수 처리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라키시 포위전 — 아시리아 전쟁 기계의 실례

산헤립의 군사 활동 중 가장 상세하게 기록된 것은 기원전 701년의 유다 왕국 원정, 특히 라키시(Lachish) 포위전입니다. 산헤립은 니느웨 궁전의 벽면 전체를 이 전투 장면으로 장식했는데, 이 부조는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대 공성전의 모습을 가장 상세하게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부조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아시리아 공병대가 공성 경사로를 쌓아올리는 모습
  • 파성퇴가 경사로를 따라 성벽에 접근하는 장면
  • 궁수와 투석병이 성벽 위의 수비군을 제압하는 장면
  • 수비군이 횃불과 사슬을 던져 파성퇴를 막으려는 모습
  • 전투 후 포로들이 줄지어 끌려가는 장면
  • 산헤립이 옥좌에 앉아 전리품과 포로를 사열하는 장면

고고학 발굴 결과, 라키시 유적에서 실제로 아시리아의 공성 경사로 잔해, 수백 개의 투석 돌, 아시리아식 화살촉, 그리고 성벽 아래에서 전사한 수비군의 유골이 발견되어 부조의 내용이 사실에 기반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산헤립은 이어서 예루살렘도 포위했으나, 이 도시는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야훼의 천사’가 아시리아 군영에 재앙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쥐떼가 아시리아 군대의 활줄과 방패끈을 갉아먹었다고 전합니다. 현대 학자들은 전염병이 아시리아 군영에 퍼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산헤립 자신의 기록에서는 히즈키야를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두었다고만 표현하며,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에사르하돈 — 이집트 정복자

에사르하돈(Esarhaddon, 재위 기원전 681~669년)은 아버지 산헤립이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암살당한 후, 형제들과의 왕위 쟁탈전을 거쳐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기원전 671년의 이집트 정복입니다.

에사르하돈은 시나이 반도를 횡단하여 이집트를 침공하고,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쿠시(누비아) 왕조의 파라오 타하르카를 격파하여 수도 멤피스를 점령했습니다. 이로써 아시리아 제국은 이란 서부에서 이집트까지,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뻗어나간 고대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4화에서 고대 이집트와 레반트의 연결고리를 다루었는데, 이제 그 연결고리를 아시리아가 통째로 장악한 것입니다.

에사르하돈은 또한 아버지가 파괴한 바빌론을 재건하는 화해 정책을 펼쳤으며, 뛰어난 행정가이자 외교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계 문제를 미리 정리하여 큰아들 아수르바니팔에게 아시리아 왕위를, 작은아들 샤마시슈무우킨에게 바빌론 왕위를 물려주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이원적 후계 구도는 결국 심각한 내전의 씨앗이 됩니다.

아수르바니팔 — 전사 왕이자 학자 왕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 재위 기원전 669~약 631년)은 아시리아 마지막 위대한 왕이자, 가장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잔인한 전사이면서 동시에 문학과 학문을 사랑한 교양인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아수르바니팔은 이집트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킨 쿠시 왕조를 격파하고, 기원전 663년 상이집트의 수도 테베(Thebes)를 약탈했습니다.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이 위대한 도시의 약탈은 고대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구약성경 나훔서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수르바니팔을 역사에 영원히 각인시킨 것은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니느웨 도서관입니다.

니느웨 도서관 — 인류 최초의 체계적 도서관

아수르바니팔은 니느웨의 궁전에 고대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제국 전역에서 점토판 문서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학자들을 고용하여 기존 문서를 복사하고 분류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약 30,000점 이상의 점토판이 수집되었으며, 그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방대했습니다:

  • 문학: 길가메시 서사시, 에누마 엘리시(천지창조 신화), 에라 서사시 등 메소포타미아 문학의 핵심 작품들
  • 과학: 천문학 관측 기록, 수학 문서, 의학 처방전
  • 종교: 기도문, 의례 지침서, 점술 매뉴얼
  • 행정: 왕실 서신, 외교 문서, 법률 문서
  • 언어: 수메르어-아카드어 사전, 문법서, 어휘 목록

특히 주목할 것은 이 도서관이 단순한 문서 보관소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분류된 도서관이었다는 점입니다. 각 점토판에는 ‘표제(colophon)’가 붙어 있어 제목, 시리즈명, 점토판 번호, 총 점토판 수, 필사자의 이름 등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현대 도서관의 서지 정보 체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2화에서 수메르인들이 문자를 발명한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그 문자 전통의 가장 위대한 결실이 바로 이 니느웨 도서관에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수르바니팔 자신도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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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중동의 역사 (총 52화 중 6화)
이전 5화  (다음 차수는 아직 게시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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