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역사] 19/52화: 아바스 왕조와 바그다드: 원형 도시가 연 이슬람 황금기
우마이야의 몰락, 아바스의 부상
지난 18화에서 우마이야 왕조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최초의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랍 우월주의와 내부 분열로 흔들리던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 역사상 가장 조직적인 혁명 중 하나에 의해 무너집니다. 그 혁명의 주인공이 바로 아바스 가문이었습니다.
아바스 혁명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축을 완전히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수도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이라크의 새로운 도시 바그다드로 이동했고, 제국의 성격 자체가 ‘아랍 정복자의 나라’에서 ‘다민족 이슬람 문명권’으로 변모했습니다.
아바스 혁명의 배경: 불만의 씨앗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
우마이야 왕조 말기, 제국 곳곳에서 불만이 축적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마왈리(mawālī) 차별이었습니다. 마왈리란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아랍 무슬림을 가리키는 말로, 페르시아인·베르베르인·투르크인 등이 여기에 해당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이슬람은 모든 신자의 평등을 선언했지만, 우마이야 왕조 하에서 마왈리는 세금 면제 혜택을 온전히 받지 못했고, 군사·행정 요직에서도 배제되었습니다.
특히 호라산(현재의 이란 동부·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 지역의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은 이중적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슬람을 받아들였음에도 이등 시민 취급을 받는 종교적 모순, 그리고 자신들의 오랜 문명적 전통이 아랍 지배층에 의해 무시당하는 문화적 굴욕감이 동시에 작용한 것입니다.
시아파와 하심 가문의 연대
여기에 시아파의 정치적 불만이 결합했습니다. 17화에서 다루었던 카르발라의 비극 이후, 알리 가문에 대한 동정과 우마이야에 대한 적대감은 이슬람 세계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바스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숙부 알아바스 이븐 압둘무탈립의 후손으로, 넓은 의미에서 ‘예언자의 가문(아흘 알바이트)’에 속했습니다.
아바스 가문은 이 점을 교묘하게 활용했습니다. 그들의 혁명 슬로건은 “예언자 가문에게 권력을(al-riḍā min āl Muḥammad)”이라는 모호한 표현이었습니다. 이 슬로건은 알리 가문 지지자(시아파)에게는 알리의 후손이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기대를, 일반 무슬림에게는 우마이야의 부당한 지배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동시에 심어주었습니다.
아부 무슬림과 호라산 혁명
아부 무슬림 알호라사니(Abū Muslim al-Khurāsānī)는 아바스 혁명의 실질적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페르시아계 출신으로 추정됩니다. 747년,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의 메르브(현재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검은 깃발을 올리며 공개적으로 반란을 선언했습니다.
검은 깃발은 아바스 혁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마이야의 흰색 깃발에 대비되는 이 검은 깃발 아래, 호라산의 아랍 정착민과 페르시아계 마왈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이 연합군은 놀라운 속도로 서쪽으로 진격하여 이라크를 점령했고, 749년 쿠파에서 아불아바스 알사파흐가 초대 아바스 칼리프로 선포되었습니다.

750년: 우마이야의 최후와 대숙청
750년 1월, 대자브 전투(Battle of the Zab)에서 마지막 우마이야 칼리프 마르완 2세의 군대가 궤멸당했습니다. 이 전투는 이라크 북부 대자브 강(티그리스 강의 지류) 유역에서 벌어졌으며, 우마이야 군의 완패로 끝났습니다. 마르완 2세는 이집트까지 도주했으나 추격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아바스 가문의 우마이야 처리 방식은 잔혹했습니다. 초대 칼리프 알사파흐(Al-Saffāḥ, ‘피를 흘리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이 암시하듯, 우마이야 왕족에 대한 체계적인 숙청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아바스 측은 우마이야 왕족들을 화해의 연회에 초대한 뒤 집단 학살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이 ‘가죽 매트 연회’ 이야기는 후대의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우마이야 왕자, 압둘라흐만 이븐 무아위야는 이 학살에서 살아남아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로 도주했습니다. 그는 756년 코르도바에서 독립 우마이야 토후국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훗날 코르도바 칼리프국으로 발전하며,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으로 분열되는 시발점이 됩니다.
알만수르: 아바스 왕조의 진정한 건설자
권력 기반의 구축
초대 칼리프 알사파흐는 754년에 사망했고, 동생 아부 자파르 알만수르(Abū Jaʿfar al-Manṣūr, 재위 754~775)가 2대 칼리프로 즉위했습니다. 알만수르야말로 아바스 왕조의 실질적 창건자입니다. 그는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조의 제도적 기반을 확립했으며, 무엇보다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를 건설했습니다.
알만수르의 첫 과제는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위험한 인물은 혁명의 영웅 아부 무슬림이었습니다. 호라산에서 절대적 인기를 누리던 아부 무슬림은 사실상 독립적 권력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755년, 알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을 궁으로 초대한 뒤 처형했습니다. 혁명을 성공시킨 장군을 제거한 이 행위는 냉혹하지만, 중앙집권화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도 평가됩니다.
또한 알만수르는 알리 가문의 반란도 진압해야 했습니다. 아바스 혁명에 기대를 걸었던 시아파는 곧 자신들이 이용당했음을 깨달았습니다. 762~763년, 메디나와 바스라에서 알리 후손 무함마드와 이브라힘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알만수르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이로써 아바스 왕조는 ‘예언자 가문의 정통성’을 독점하면서도 시아파의 정치적 요구는 거부하는 이중적 입장을 확립했습니다.
통치 철학의 변화
알만수르 치세에서 칼리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했습니다. 우마이야 시대의 칼리프가 ‘아랍 부족 연합의 수장’에 가까웠다면, 아바스의 칼리프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한샤(왕 중의 왕)에 가까운 절대 군주로 변모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스타일 변화가 아니라, 페르시아적 관료 전통의 본격적 도입을 의미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와지르(wazīr, 재상) 제도의 확립이었습니다. 칼리프는 직접 행정을 집행하기보다 와지르를 통해 통치했으며, 이는 사산조의 ‘부즈르그 프라마탈(대재상)’ 전통의 부활이었습니다. 또한 궁정 의례가 극도로 격식화되어, 칼리프는 장막 뒤에서 신하를 접견하고, 칼리프 앞에서 땅에 입 맞추는 의례(수주드)가 도입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페르시아 관료층의 영향력 증대를 반영합니다. 아바스 초기의 핵심 관료 가문인 바르마크 가문(Barmakids)은 원래 발흐(현재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불교 사원 관리자 가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탁월한 행정 능력으로 아바스 왕조의 핵심 관료가 되었고, 나중에 다룰 하룬 알라시드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바그다드 건설: 역사상 가장 야심찬 도시 계획
왜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는가
알만수르가 새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다마스쿠스는 우마이야 왕조의 상징이었으므로 정치적으로 부적합했습니다. 둘째, 혁명의 근거지였던 쿠파는 시아파 성향이 강했고 반란의 위험이 높았습니다. 셋째, 새 왕조에는 과거의 유산에 구속받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시작점이 필요했습니다.
알만수르는 이라크 중부의 여러 후보지를 직접 답사하며 검토했습니다. 역사가 알타바리에 따르면, 알만수르는 각 후보지에서 직접 야영하며 기후·접근성·방어 적합성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은 티그리스 강 서안의 한 지점으로, 고대 페르시아어로 ‘바그다드(Baghdād)’라 불리던 작은 마을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입지의 전략적 우월성
바그다드의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탁월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가장 가까이 접근하며, 두 강을 잇는 운하망이 이미 사산조 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 이는 곧 바그다드가 메소포타미아의 수운(水運) 교통 중심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이 위치는 제국의 동서를 잇는 교차점이었습니다.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이집트,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남쪽으로는 바스라를 통한 인도양 무역로,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와 비잔틴 접경지가 연결되었습니다. 다마스쿠스가 지중해 세계에 편향되어 있었다면, 바그다드는 진정한 의미에서 제국의 중심에 위치했습니다.
사산조의 옛 수도 크테시폰(마다인)이 불과 35km 남쪽에 있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알만수르는 크테시폰의 폐허에서 건축 자재를 가져와 바그다드 건설에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실용적 이유도 있었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의 제국적 유산을 계승한다는 상징적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마디나트 알살람: 원형 도시의 설계
공식 명칭과 건설 과정
바그다드의 공식 명칭은 마디나트 알살람(Madīnat al-Salām), 즉 ‘평화의 도시’였습니다. ‘살람’은 이슬람에서 천국의 별칭이기도 하여, 이 도시가 지상의 천국임을 암시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옛 지명인 ‘바그다드’가 계속 사용되어 결국 그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건설은 762년 7월 30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알마수디 등의 역사가에 따르면, 알만수르는 궁정 점성술사 나우바흐트에게 착공의 길일을 정하도록 명했고, 사수자리(궁수자리)가 상승하는 시점이 선택되었다고 합니다. 이 점성술적 결정은 당시 페르시아·헬레니즘 학문이 이슬람 궁정에 이미 깊이 스며들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건설에는 약 10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건축가·기술자·석공·목수 등이 제국 전역에서 모집되었으며, 건설 기간은 약 4년(762~766년)이 걸렸습니다. 알만수르는 건설 과정을 직접 감독했으며, 벽돌 한 장의 크기까지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원형 설계의 구조
바그다드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완벽한 원형 평면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도시는 ‘원형 도시(al-Mudawwara)’ 또는 ‘알만수르의 원형 도시’라고도 불립니다. 고대와 중세를 통틀어 완벽한 원형으로 계획된 도시는 극히 드물며, 이 점에서 바그다드는 도시 설계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원형 도시의 지름은 약 2.7km였습니다. 이 도시는 동심원 구조로 세 겹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 외벽(제1 성벽): 높이 약 18m, 두께 약 44m의 거대한 구운 벽돌 벽으로, 외부 방어의 첫 번째 방벽이었습니다. 외벽 바깥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었습니다.
- 내벽(제2 성벽): 외벽보다 더 높고 견고한 내벽으로, 방어의 핵심이었습니다. 높이는 약 27m에 달했으며, 일정 간격으로 원형 망루가 배치되었습니다.
- 가장 안쪽 벽(제3 성벽): 칼리프의 궁전과 대모스크를 둘러싼 내부 구역을 보호하는 벽이었습니다.
네 개의 문
원형 도시에는 정확히 네 개의 문이 사방에 배치되었으며, 각 문은 해당 방향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와 연결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 바브 알쿠파(쿠파 문) — 남서쪽, 쿠파와 메카 방향
- 바브 알바스라(바스라 문) — 남동쪽, 바스라와 인도양 방향
- 바브 알샴(시리아 문) — 북서쪽, 시리아와 비잔틴 방향
- 바브 호라산(호라산 문) — 북동쪽,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방향
이 네 문의 이름 자체가 바그다드의 지정학적 위치를 웅변합니다. 남서쪽으로 이슬람의 성지, 남동쪽으로 해상 무역로, 북서쪽으로 지중해 세계, 북동쪽으로 이란 고원과 실크로드 — 바그다드는 이 모든 방향의 교차점에 자리한 것입니다.
각 문에서 중심부를 향해 아치형 복도(타크)가 뻗어 있었으며, 이 네 개의 대로가 도시의 주축을 형성했습니다. 대로 양쪽에는 시장·거주 구역이 배치되었으나, 나중에 안보상의 이유로 시장은 도시 외부로 이전됩니다.

중심부: 칼리프의 궁전과 대모스크
원형 도시의 정중앙에는 두 건물이 자리했습니다. 칼리프의 궁전(다르 알킬라파)과 대모스크(자미 알만수르)입니다. 이 배치는 심오한 상징성을 담고 있었습니다. 세속 권력(궁전)과 종교 권위(모스크)가 도시의 심장에 나란히 위치함으로써, 칼리프가 정치적·종교적 지도자임을 공간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칼리프의 궁전은 바브 알다하브(황금 문의 궁전)라 불렸습니다. 궁전 위에는 높이 약 39m의 녹색 돔(알쿠바 알하드라)이 솟아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기마 전사 형상의 풍향계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녹색 돔은 바그다드의 랜드마크이자, 아바스 왕조 권력의 시각적 상징이었습니다. 941년 폭풍으로 무너질 때까지 약 180년간 바그다드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했습니다.
대모스크는 정사각형 평면으로, 한 변의 길이가 약 20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수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올릴 수 있었으며, 금요 집단예배 시 칼리프가 직접 설교단(민바르)에 서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도시 설계의 사상적 기원
바그다드의 원형 설계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까요? 학자들은 여러 기원을 제시합니다:
-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통: 사산조의 도시 다라브게르드와 피루자바드가 원형 평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피루자바드는 사산조 창건자 아르다시르 1세가 건설한 원형 도시로, 바그다드와 구조적 유사성이 큽니다.
- 중앙아시아의 원형 요새: 호라산과 중앙아시아에는 원형 또는 타원형 성곽 도시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 우주론적 상징: 원형은 완전함과 우주적 질서를 상징합니다. 칼리프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도시 구조는 칼리프가 세계의 중심임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 유클리드 기하학: 당시 이슬람 세계에 유입된 그리스 수학·기하학의 영향도 지적됩니다. 원형 도시는 기하학적 이상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선례는 사산조의 원형 도시 전통이며, 이는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적 통치 전통을 의식적으로 계승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원형 도시 너머: 바그다드의 확장
카르흐와 루사파
원형 도시는 바그다드의 핵심이었지만, 도시 전체는 아니었습니다. 건설 직후부터 원형 도시 바깥으로 시가지가 급속히 팽창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구역은 카르흐(al-Karkh)와 루사파(al-Ruṣāfa)였습니다.
카르흐는 원형 도시 남쪽, 티그리스 강 서안에 발달한 상업 지구였습니다. 알만수르가 안보상의 이유로 원형 도시 내부의 시장을 철거하고 상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면서 형성되었습니다. 카르흐는 바그다드 최대의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여 수백 개의 전문 시장(수크)이 밀집했습니다.
루사파는 티그리스 강 동안(東岸)에 발달한 구역으로, 알만수르의 후계자 알마흐디가 왕세자 시절 이곳에 궁전을 건설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바그다드는 강 양안에 걸친 거대 도시로 발전했으며, 여러 개의 부교(浮橋)가 양안을 연결했습니다.
인구와 규모
8세기 말~9세기 초 바그다드의 인구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이 있습니다. 보수적으로는 50만 명, 과장된 사료를 따르면 100만~200만 명까지 제시됩니다. 정확한 수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같은 시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약 30~50만, 당나라 장안이 약 100만으로 추정되므로, 바그다드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능가하는 규모였습니다.
도시의 물리적 확장 속도도 놀라웠습니다. 건설 50년 만에 바그다드의 시가지는 원형 도시의 몇 배에 달하는 면적으로 팽창했습니다. 이는 아바스 제국의 경제적 번영과 바그다드의 중심지로서의 흡인력을 동시에 증명합니다.
아바스 왕조의 행정 혁신
디완 체제의 정비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시대에 시작된 디완(dīwān, 관청/부서) 체제를 크게 확대·정비했습니다. 주요 디완으로는 다음이 있었습니다:
- 디완 알하라즈(세무부): 제국의 조세 징수와 재정 관리를 담당
- 디완 알라사일(문서부): 공식 서한·칙령의 작성과 발송을 담당
- 디완 알준드(군사부): 군대의 급여 지급과 병적 관리를 담당
- 디완 알바리드(우편부): 제국 전역의 우편·정보 전달 체계를 관리
- 디완 알마잘림(탄원법정): 일반 시민의 억울함을 직접 심리하는 기관
특히 바리드(우편 체계)는 단순한 우편 시스템이 아니라 제국의 정보·감시 네트워크 역할을 했습니다. 각 지방의 우편국장은 해당 지역의 동향을 중앙에 보고하는 첩보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 체계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앙가리온’ 체계를 개량한 것이었습니다.
와지르와 관료제
앞서 언급한 와지르 제도는 아바스 왕조의 핵심 행정 혁신이었습니다. 와지르는 칼리프를 대신하여 일상적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관료로, 현대의 총리에 비견됩니다. 초기 아바스 왕조의 가장 유명한 와지르 가문은 바르마크 가문이었습니다.
바르마크 가문의 할리드 이븐 바르마크는 알만수르 시대에 재정 관료로 활동했고, 그의 아들 야흐야 이븐 할리드는 하룬 알라시드의 가정교사이자 재상이 되었습니다. 야흐야의 아들 자파르는 하룬 알라시드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유명했습니다. 바르마크 가문은 학문·예술의 후원자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그들의 전성기는 아바스 문화 황금기의 서막이기도 합니다.
경제 체제와 무역
아바스 왕조의 경제적 번영은 몇 가지 구조적 요인에 기반했습니다:
- 농업 혁명: 이라크의 관개 체계가 대규모로 복원·확장되었습니다. 사산조 시대에 건설된 운하망이 재정비되고 새로운 운하가 추가되어, 메소포타미아의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 화폐 경제의 확대: 금 디나르와 은 디르함의 안정적 주조가 이루어졌고, 신용장(수크크), 수표(사크), 환전상(사라프) 등 발달된 금융 시스템이 운용되었습니다.
- 장거리 무역: 바그다드는 중국·인도·동남아시아·동아프리카·비잔틴·서유럽을 잇는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이었습니다. 바스라 항구를 통한 인도양 무역이 특히 활발했습니다.
9세기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바그다드의 시장에서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인도의 향신료와 보석, 동아프리카의 상아와 금, 스칸디나비아의 모피와 호박(琥珀), 비잔틴의 직물 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는 아바스 시대 바그다드가 누린 국제적 지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다민족·다종교 제국의 운영
마왈리의 통합
아바스 혁명의 핵심 약속 중 하나는 마왈리에 대한 차별 철폐였습니다. 실제로 아바스 왕조 하에서 비아랍 무슬림의 사회적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인이 재상·총독·장군으로 활동했고, 투르크인은 군사 엘리트로 부상했습니다. 아바스 궁정의 공용어는 아랍어였지만,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슈우비야(shu’ūbiyya)’ 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슈우비야는 비아랍 무슬림, 특히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의 문화적 우월성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문명적 전통의 가치를 주장한 문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아바스 시대에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페르시아 문학의 부흥과도 연결됩니다.
딤미 제도와 비무슬림
아바스 왕조 하의 비무슬림(기독교인, 유대교인, 조로아스터교인 등)은 딤미(dhimmī)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딤미는 ‘보호받는 자’라는 의미로, 인두세(지즈야)를 납부하는 대가로 생명·재산·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습니다.
바그다드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공동체가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으며, 이들은 특히 의학·번역·행정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좌는 바그다드에 위치했고, 칼리프와 총대주교 사이에는 일정한 외교적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유대교 공동체 역시 상업과 학문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물론 이 ‘관용’의 범위와 한계를 이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딤미에게는 복장 규정, 건축물 높이 제한 등 차별적 규정이 적용되었고, 칼리프에 따라 이러한 규정의 집행 강도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 유럽의 종교적 소수자 처우와 비교하면, 아바스 왕조의 다종교 공존 체제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초기 아바스 왕조의 대외 관계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
아바스 왕조는 비잔틴 제국과 지속적인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양국의 접경 지대인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거의 매년 상호 침공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접경 지대에는 수구르(thughūr)라 불리는 요새 도시들이 건설되었고, 자원하여 이곳에서 지하드에 참여하는 전사들(무자히딘/가지)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순수하게 적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포로 교환, 외교 사절 교류, 심지어 기술·학문의 교류도 이루어졌습니다. 비잔틴에서 가져온 그리스어 필사본이 바그다드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당나라와의 접촉: 탈라스 전투
아바스 왕조 초기의 가장 흥미로운 대외 사건 중 하나는 751년 탈라스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현재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접경의 탈라스 강 유역에서 아바스 군과 당나라 군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배경은 중앙아시아의 패권 다툼이었습니다. 당나라의 안서도호부(안시 절도사부)와 아바스 왕조 모두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 도시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당나라 장수 고선지(高仙芝)가 이끄는 연합군과 아바스 장군 지야드 이븐 살리흐가 이끄는 군대가 충돌했고, 결과는 아바스 측의 승리였습니다.
탈라스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소규모였지만, 문명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이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당나라의 영향력이 퇴조하고 이슬람 세계의 영향권이 확대되었습니다. 둘째, 전투에서 포로가 된 당나라 병사들 중에 제지(製紙) 기술자가 있었고, 이를 통해 종이 제조 기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종이의 전파는 이슬람 학문 발전에 혁명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비해 종이는 저렴하고 생산이 용이하여, 서적의 대량 생산과 지식의 보급을 촉진했습니다. 사마르칸트에 제지 공장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카이로, 모로코,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유럽으로까지 종이 기술이 전파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과의 외교
800년경, 아바스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와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샤를마뉴) 사이에 외교 사절이 교환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두 군주는 공통의 적인 우마이야 코르도바와 비잔틴을 견제하기 위해 접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카를 대제에게 보낸 선물 중에는 코끼리 한 마리와 물시계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이국적 선물들은 프랑크 궁정에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적·문화적 토대의 형성
번역 운동의 시작
아바스 시대 바그다드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사업 중 하나는 그리스어·시리아어·페르시아어·산스크리트어 저작의 아랍어 번역이었습니다. 이 번역 운동은 알만수르 시대에 시작되어, 알마문(9세기 초) 시대에 절정에 달합니다.
알만수르 자신이 학문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비잔틴 황제에게 유클리드의 《원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인도의 천문학서 싯단타(Siddhānta)가 번역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인도인 학자가 바그다드를 방문하여 인도 수학·천문학 지식을 전한 것이 77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이 번역 운동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다민족 제국의 특성이 있었습니다. 시리아어를 구사하는 기독교인 학자들이 그리스어 원전을 시리아어로, 다시 아랍어로 중역했고, 페르시아인 학자들이 팔라비어(중세 페르시아어) 문헌을 번역했습니다. 바그다드라는 다문화 도시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문명 간 지식 전달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바그다드의 학문 공동체
아바스 초기 바그다드에는 다양한 학문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 법학(피크흐): 이슬람 법의 4대 학파 중 하나인 하나피 학파의 창시자 아부 하니파(699~767)가 바그다드에서 활동했습니다.
- 신학(칼람): 무타질라파 등 이성주의 신학이 바그다드에서 꽃피었습니다.
- 문학: 아랍어 문법과 어학의 체계화가 바스라와 쿠파 학파 사이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바그다드는 이 논쟁의 중심지였습니다.
- 과학: 천문학, 수학, 의학, 연금술 등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적 토대 위에서 9세기의 ‘지혜의 집(바이트 알히크마)’과 이슬람 과학의 황금기가 꽃피게 됩니다. 바그다드 건설 이후 불과 한 세대 만에 이 도시가 세계적 학문 중심지로 부상한 것은, 아바스 왕조의 의식적인 학문 후원 정책과 바그다드라는 도시의 국제적 성격이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였습니다.
원형 도시의 역사적 의의
도시 계획사에서의 위치
바그다드의 원형 도시는 고대·중세 도시 계획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 기능적 구역 분할, 방어·교통·상징성을 동시에 고려한 설계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습니다.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건설된 계획 도시들 —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구시가, 사마라, 페스 등 — 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안타�게도 원형 도시의 물리적 흔적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미 9세기에 사마라 천도로 원형 도시가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후 수세기에 걸친 전란·홍수·재건으로 원래의 구조물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현대 바그다드에서 원형 도시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원형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알타바리, 알야쿠비, 알하티브 알바그다디 등 중세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존합니다.
문명의 교차로로서의 바그다드
바그다드의 진정한 의의는 단순한 건축적 업적을 넘어섭니다. 이 도시는 문명의 교차로이자 지식의 용광로였습니다. 그리스 철학, 페르시아 행정술, 인도 수학, 중국의 기술이 이곳에서 만나 융합되었고, 그 결과물이 아랍어라는 공용어를 통해 이슬람 세계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알만수르가 바그다드를 건설할 때, 그는 단순히 행정 수도를 짓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 인류 지성사의 결정적 무대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바그다드라는 무대 위에서 이슬람 황금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아바스 초기의 한계와 모순
그러나 아바스 왕조의 성취만을 강조하면 불균형한 서술이 됩니다. 몇 가지 중요한 한계와 모순을 짚어야 합니다.
첫째, 시아파에 대한 배신입니다. 혁명의 핵심 동력이었던 시아파는 아바스 왕조 수립 후 오히려 탄압받았습니다. 알만수르의 시아파 반란 진압은 이 배신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둘째, 제국의 분열 조짐입니다. 아바스 왕조는 출범 시점부터 이베리아의 우마이야 잔존 세력을 제거하지 못했고, 이후 북아프리카의 이드리스 왕조(789년),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왕조(800년) 등 사실상 독립적인 지방 정권이 출현합니다. ‘하나의 칼리프국’이라는 이상은 이미 초기부터 균열이 있었습니다.
셋째, 절대 권력의 어두운 면입니다. 알만수르의 통치는 효율적이었으나 잔혹하기도 했습니다. 아부 무슬림의 처형, 정적의 숙청, 공포 정치의 요소들은 이 ‘황금기의 건설자’의 또 다른 면모입니다.
아바스 왕조의 역사적 위치
아바스 왕조(750~1258)는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긴 왕조 중 하나입니다. 비록 10세기 이후에는 실질적 권력을 상실하고 명목적 종주권만 유지했지만, 아바스 칼리프라는 직함 자체는 500년 이상 존속했습니다. 이 왕조의 초기 150년(750~900)은 흔히 ‘이슬람 황금기’의 핵심 시기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그 황금기의 물리적 중심이 바로 바그다드였습니다. 알만수르가 티그리스 강변의 허허벌판에 원을 그린 그 순간, 인류 문명사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입니다. 762년에 착공된 이 원형 도시는 이후 수세기간 세계 학문과 문화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음 20화에서는 이슬람 황금기의 절정, 하룬 알라시드와 ‘천일야화’의 시대를 다룹니다. 아바스 왕조의 가장 화려한 시절, 바그다드가 전설적 번영을 누리던 그 시대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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