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역사] 14/52화: 자힐리야 시대: 무함마드 이전 아라비아의 부족사회와 문화
자힐리야, ‘무지의 시대’라는 이름 너머
‘자힐리야(الجاهلية)’라는 단어는 아랍어로 ‘무지’ 혹은 ‘무지몽매’를 뜻합니다. 이슬람 전통에서 무함마드의 등장 이전 시기를 가리키는 이 용어는, 이슬람 계시가 도래하기 전 아라비아 반도가 도덕적·종교적으로 어둠 속에 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면밀히 살펴보면, 자힐리야 시대의 아라비아는 결코 ‘무지’하기만 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정교한 부족 체계, 풍부한 구전 문학 전통, 복잡한 상업 네트워크, 그리고 다양한 종교적 실천이 공존하는 역동적인 세계였습니다.
지난 13화에서 우리는 나바테아, 팔미라, 사바 왕국 등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반도 주변부의 찬란한 문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14화에서는 시선을 아라비아 반도 내부, 특히 히자즈와 나즈드 지역의 베두인 사회와 도시 공동체로 돌려,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직전 수백 년간 아라비아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아라비아 반도의 지리와 생활 환경
사막이 만든 삶의 방식
아라비아 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로, 면적이 약 30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합니다. 반도의 대부분은 혹독한 사막 지대입니다. 중앙부의 나즈드(Najd) 고원은 건조한 스텝 지대이며, 남동부에는 세계 최대의 사막 중 하나인 룹알할리(Rub’ al-Khali, 빈 사막)가 펼쳐져 있습니다. 북부의 나푸드(Nafud) 사막과 함께, 이 광대한 모래바다는 아라비아 내륙을 외부 세계와 자연적으로 격리시키는 장벽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반도 전체가 불모지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쪽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히자즈(Hejaz) 산맥 지대에는 오아시스 도시들이 자리 잡았고, 남서부의 예멘 고원은 인도양 몬순의 영향으로 비교적 풍부한 강수량을 자랑하며 농경이 가능했습니다. 동부 해안의 바레인과 오만 지역은 어업과 진주 채취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 조건은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들에게 크게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유목 생활(베두인)과 정주 생활(하다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생활방식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호 의존하는 독특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오아시스 도시들: 메카, 야스리브, 타이프
히자즈 지역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자힐리야 시대 아라비아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메카(Mecca)는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메카는 해발 약 277미터의 건조한 계곡에 위치해 농업에는 부적합했지만, 두 가지 결정적 이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남북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라는 지리적 위치, 둘째, 카바(Ka’ba) 신전이라는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지위였습니다.
야스리브(Yathrib, 훗날의 메디나)는 메카 북쪽 약 340킬로미터에 위치한 비옥한 오아시스 도시였습니다. 대추야자 농업이 발달했으며, 아우스(Aws)와 하즈라지(Khazraj)라는 두 주요 아랍 부족과 여러 유대계 부족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의 복잡한 부족 간 갈등은 훗날 무함마드가 중재자로 초청되는 배경이 됩니다.
타이프(Ta’if)는 메카 남동쪽 산악 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선선한 기후 덕분에 과일과 포도 재배가 이루어졌습니다. 메카의 부유층이 여름 별장을 두는 휴양지이기도 했으며, 사키프(Thaqif) 부족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알라트(al-Lat) 여신의 주요 신전이 이곳에 있었다는 점에서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부족 사회의 구조와 원리
부족(카빌라)과 씨족(바트): 혈연이 곧 정체성
자힐리야 시대 아라비아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는 ‘부족(قبيلة, 카빌라)’ 체계입니다. 아라비아인들은 공통 남성 조상으로부터의 혈통을 기준으로 사회적 정체성을 규정했습니다. 부족은 다시 여러 씨족(بطن, 바트)으로 나뉘었고, 씨족은 다시 가문(فخذ, 파크드)으로 세분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혈연 기반 조직은 단순한 가족 관계를 넘어, 정치·경제·군사·법률적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총체적 사회 단위였습니다.
아랍 부족의 계보학은 궁극적으로 두 갈래의 대분류로 수렴합니다. ‘카흐탄(Qahtan)’ 계통과 ‘아드난(Adnan)’ 계통이 그것입니다. 카흐탄 계통은 남부 아라비아(예멘)의 정주 부족들을, 아드난 계통은 북부 아라비아의 유목 부족들을 대표합니다. 전통적으로 카흐탄은 성서의 욕단에, 아드난은 이스마엘(이브라힘의 아들)에 연결되는 계보로 설명됩니다. 이 남북 부족 간의 경쟁과 갈등은 이슬람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아랍 정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족 구성원 사이의 유대는 ‘아사비야(عصبية)’라는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이것은 부족적 연대 의식, 집단적 자부심, 상호 보호 의무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14세기 역사가 이븐 할둔(Ibn Khaldun)은 이 아사비야를 문명의 흥망을 설명하는 핵심 동력으로 파악했습니다. 아사비야가 강한 집단은 권력을 장악하고, 정주화와 문명화 과정에서 아사비야가 약해지면 새로운 유목 집단에 의해 교체된다는 것이 그의 순환론적 역사관이었습니다.
족장(사이드)과 의사결정: 원시적 민주주의
아라비아 부족의 지도자는 ‘사이드(سيد)’ 혹은 ‘셰이크(شيخ)’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이드의 권위는 세습이 아닌 합의(슈라, شورى)에 기반했으며, 구성원들의 존경과 자발적 복종을 통해 유지되었습니다. 사이드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자질이 필요했습니다.
- 용기(شجاعة, 슈자아): 전투에서의 용맹함은 지도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이었습니다. 부족을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능력이 없는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 관대함(كرم, 카람): 재산을 부족원과 나누고, 손님을 환대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은 사이드의 핵심 의무였습니다. 인색한 지도자는 곧 추종자를 잃었습니다.
- 지혜(حلم, 힐름): 분쟁을 중재하고, 부족의 이익을 위한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 요구되었습니다. ‘힐름’은 단순한 지적 능력을 넘어, 인내심과 자제력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덕목이었습니다.
- 웅변(بلاغة, 발라가): 구전 문화 사회에서 말을 잘하는 능력은 곧 정치적 힘이었습니다. 부족 회의(마즐리스)에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중요한 결정은 부족 원로들이 참여하는 회의(مجلس, 마즐리스)에서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사이드는 이 회의를 주재하고 최종 의견을 제시했지만, 구성원들을 강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사이드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구성원은 부족을 떠나 다른 부족에 합류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일종의 ‘원시적 민주주의’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혈수 복수(싸르)와 부족법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이 부재한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은 ‘혈수 복수(ثأر, 싸르)’ 관행이었습니다. 한 부족의 구성원이 다른 부족에 의해 살해되면, 피해 부족은 가해 부족의 구성원을 동등하게 살해할 권리와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원시적 야만성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폭력을 억제하는 기능을 했습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해치면 자기 부족 전체가 보복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강력한 억지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혈수 복수의 연쇄가 시작되면 세대를 넘어 지속되는 끔찍한 부족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디야(دية, 혈전 배상금)’ 제도가 발전했습니다. 살인에 대한 보복 대신 일정한 양의 낙타나 재산을 배상금으로 지불함으로써 분쟁을 종결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양측이 존경하는 제3의 부족장이나 카힌(점술사)이 중재자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힐리야 시대의 가장 유명한 부족 전쟁으로는 ‘다히스와 알가브라 전쟁(حرب داحس والغبراء)’이 있습니다. 아브스(Abs)와 두브얀(Dhubyan) 부족 사이의 이 전쟁은, 전설에 따르면 경마 시합의 부정행위에서 비롯되어 40년간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바수스 전쟁(حرب البسوس)은 바크르(Bakr)와 타글리브(Taghlib) 부족 사이에 한 마리 암낙타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40년간 이어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전쟁들의 이야기는 후대에 문학적으로 각색되었지만, 부족 갈등이 어떻게 장기화될 수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경제 활동: 유목, 교역, 그리고 약탈
베두인의 유목 경제
아라비아 반도 내륙의 주요 생업은 유목이었습니다. 베두인(بدوي)이라 불리는 유목민들은 낙타, 양, 염소 등의 가축을 이끌고 계절에 따라 목초지와 수원을 찾아 이동했습니다. 이 중 낙타는 가장 핵심적인 가축이었습니다. 낙타는 교통수단, 식량원(고기와 젖), 의복 재료(가죽과 털), 교역 상품, 그리고 부의 척도로서 다기능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아랍어에는 낙타를 지칭하는 단어가 수백 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나이, 성별, 색상, 용도, 건강 상태 등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는 이 풍부한 어휘는 베두인 생활에서 낙타가 얼마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낙타 없는 베두인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으며, 낙타는 “사막의 배(سفينة الصحراء)”라 불리며 사막 횡단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의 이동 패턴은 무작위적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환경 지식에 기반한 정교한 체계였습니다. 각 부족은 전통적으로 관할하는 이동 영역(디라, ديرة)이 있었고, 우물과 목초지에 대한 관습적 권리가 인정되었습니다. 이 권리를 침범하는 것은 부족 간 무력 충돌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향료 교역로와 상업 도시
아라비아 반도의 경제적 중요성은 국제 교역로에서의 위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남부 아라비아(예멘)에서 생산되는 유향(乳香, frankincense)과 몰약(没薬, myrrh)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상품 중 하나였습니다. 이 향료들은 종교 의식, 의약품, 방부 처리에 필수적이었으며, 로마 제국,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수요가 있었습니다.
향료 교역로는 예멘에서 출발하여 히자즈 해안을 따라 북상한 뒤, 레반트의 가자나 페트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교역로 곳곳에 중간 기착지와 시장이 발전했고, 메카는 그중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13화에서 살펴본 나바테아와 팔미라가 이 교역로의 북부 구간을 장악했다면, 남부 구간은 예멘의 사바 왕국과 이후의 힘야르(Himyar) 왕국이 통제했습니다.
5~6세기에 이르면 메카의 쿠라이시(Quraysh) 부족이 이 교역의 핵심 중개자로 부상합니다. 전설적인 쿠라이시의 지도자 쿠사이 이븐 킬랍(Qusayy ibn Kilab)은 메카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카바 신전의 관리권을 장악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후손인 하심(Hashim)은 비잔틴 제국과, 압드 샴스(Abd Shams)의 아들 우마이야(Umayya)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교역 협정을 체결하여, 쿠라이시 부족은 남북 교역뿐 아니라 동서 교역까지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쿠라이시 부족은 ‘일라프(إيلاف)’라 불리는 교역 협정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이것은 교역로 주변 부족들과의 안전 통행 보장 협정으로, 일종의 상호 불가침 조약이자 무역 특혜 협정이었습니다. 이 시스템 덕분에 쿠라이시의 대상(隊商, 카라반)은 비교적 안전하게 장거리 교역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꾸란의 제106장(쿠라이시 장)은 바로 이 일라프 체계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주요 시장과 정기 시장
자힐리야 시대의 아라비아에는 여러 정기 시장이 열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우카즈(عكاظ) 시장이었습니다. 메카와 타이프 사이에서 매년 둘히자 달 직전에 열리는 이 시장은 단순한 상업 공간을 넘어,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문화·정치적 교류 장소였습니다. 시인들은 이곳에서 시 낭송 대회를 벌였고, 부족 간 분쟁이 중재되었으며, 동맹이 맺어지고 깨졌습니다.
우카즈 외에도 마지나(Majinna), 둘마자즈(Dhu al-Majaz) 등의 시장이 메카 순례 시즌에 맞춰 순차적으로 열렸습니다. 상인들은 이 시장들을 순회하며 거래를 하고, 최종적으로 메카에 도착하여 하즈(순례)를 수행했습니다. 이처럼 상업과 종교가 긴밀하게 결합된 것은 자힐리야 시대 메카 경제의 핵심적 특징이었습니다.
가주(약탈)의 경제학
유목 사회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경제 활동은 ‘가주(غزو)’로 불리는 약탈 습격이었습니다. 이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범죄 행위로 보일 수 있지만, 자힐리야 시대의 맥락에서는 정당한 경제 활동의 하나로 인식되었습니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의 가축을 기습적으로 빼앗아 오는 이 행위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습니다.
가주의 목적은 약탈 자체이지 살상이 아니었습니다. 가능하면 인명 피해 없이 가축만 빼앗아 오는 것이 이상적이었으며, 불필요한 살인은 혈수 복수의 연쇄를 초래하므로 피해야 했습니다. 여성, 아이, 노인에 대한 폭력은 관습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규칙이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무법적인 약탈과는 구별되는 관습적 프레임이 존재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자힐리야 시대의 종교 세계
다신교와 범신론의 풍경
자힐리야 시대의 아라비아인들은 다양한 종교적 믿음과 실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다신교(شرك, 쉬르크)였습니다. 아라비아 각지에는 수많은 신과 여신이 숭배되었으며, 각 부족과 도시는 자신들만의 수호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세 여신이 있었습니다. 알라트(اللات)는 타이프에서 주로 숭배된 여신으로, 그 이름은 ‘신(알일라흐)’의 여성형입니다. 하얀 화강암 바위가 그녀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알웃자(العزى)는 ‘가장 강력한 자’라는 뜻으로, 메카와 타이프 사이의 나크라(Nakhla) 계곡에서 숭배되었으며, 쿠라이시 부족이 특히 경외한 여신이었습니다. 마나트(مناة)는 운명의 여신으로, 메카와 야스리브 사이의 쿠다이드(Qudayd)에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우스와 하즈라지 부족이 주로 숭배했습니다.
이 세 여신은 때로 ‘알라(الله)’의 딸들로 여겨졌습니다. ‘알라’라는 이름 자체는 이슬람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최고신 혹은 창조신의 개념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자힐리야 시대의 알라는 이슬람에서의 유일신과는 달리, 다른 신들과 공존하는 최고신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알라를 인정하면서도 일상적인 기도와 제물은 하위 신들에게 바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카바 신전과 360개의 우상
메카의 카바(الكعبة) 신전은 자힐리야 시대 아라비아 종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카바는 원래 아브라함(이브라힘)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스마일)이 유일신을 위해 세운 성소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상 숭배의 장소로 변질되었다고 합니다.
자힐리야 시대의 카바에는 아라비아 각지 부족들의 우상 360개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각 부족이 자신의 수호신 상을 카바에 봉안함으로써 메카와의 유대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카바의 동쪽 모서리에는 ‘흑석(الحجر الأسود, 하자르 알아스와드)’이 박혀 있었는데, 이것은 운석 파편으로 추정되며 순례자들이 의례적으로 만지거나 입을 맞추었습니다.
카바를 중심으로 한 순례(하즈) 의식은 이슬람 이전부터 행해졌습니다. 매년 순례 시즌이 되면 아라비아 각지에서 수천 명이 메카로 모여들었고, 이 기간에는 전투가 금지되는 ‘성월(聖月, الأشهر الحرام)’이 선포되었습니다. 성월은 라자브(7월), 둘카으다(11월), 둘히자(12월), 무하람(1월)의 네 달이었으며, 이 기간의 전투 금지는 교역과 순례의 안전을 보장하는 핵심적 관습이었습니다.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은 카바의 관리를 통해 종교적 권위와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확보했습니다. 카바의 열쇠 관리(히자바), 순례자에 대한 급수(시카야), 급식(리파다) 등의 역할이 쿠라이시의 주요 가문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이는 곧 정치적 권력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진, 카힌, 그리고 점술
자힐리야 시대 아라비아인들의 종교적 세계관에서 ‘진(جن, 정령)’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진은 인간과 천사 사이의 초자연적 존재로, 사막의 외딴 곳, 폐허, 우물, 나무 등에 거주한다고 믿어졌습니다. 진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인간에게 영감을 주거나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시인들의 영감은 진에게서 온다고 여겨졌습니다. 각 위대한 시인에게는 그를 인도하는 특정한 진이 있다고 믿었으며, 시의 초자연적 힘은 이 진과의 연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부족의 대변자이자 초자연적 힘을 가진 존재로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카힌(كاهن)’은 점술사 혹은 예언자로, 진과 소통하여 미래를 예언하거나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카힌의 발언은 특유의 운율 있는 산문체(사즈으, سجع)로 이루어졌으며, 이 신비로운 언어 형식 자체가 그의 권위를 뒷받침했습니다. 부족 간 분쟁의 중재, 잃어버린 낙타의 소재 파악, 여행의 길흉 판단 등이 카힌에게 의뢰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점술 방법이 활용되었습니다. ‘아즈람(أزلام)’이라 불리는 점술용 화살을 사용하는 방법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보통 세 개의 화살에 ‘하라’, ‘하지 마라’, ‘비어있음’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이를 무작위로 뽑아 결정에 참고했습니다. 새의 비행 방향이나 울음소리를 통한 점술(티야라, طيرة)도 널리 행해졌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하니프의 존재
자힐리야 시대의 아라비아가 순수하게 다신교 사회였던 것은 아닙니다. 유일신 전통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아라비아 반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야스리브(메디나)에는 바누 카이누카(Banu Qaynuqa), 바누 나디르(Banu Nadir), 바누 쿠라이자(Banu Qurayza) 등 유대계 부족들이 거주하며, 농업과 금속 세공에 종사했습니다. 예멘의 힘야르 왕국은 4세기 후반에 왕실이 유대교로 개종했으며, 6세기 초 유대교도 왕 두 누와스(Dhu Nuwas)가 기독교도를 박해한 사건은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나즈란(Najran)의 기독교도 학살로 알려져 있으며, 꾸란 제85장의 ‘도랑(우크두드)의 사람들’ 이야기와 연관됩니다.
기독교 역시 아라비아 반도 주변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북부에서는 가산(Ghassan) 왕국이 비잔틴 제국의 속국으로서 단성론(Monophysitism)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동북부에서는 라크미드(Lakhmid) 왕국이 사산조 페르시아의 속국으로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접촉했습니다. 남부에서는 에티오피아(악숨 왕국)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어, 나즈란이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존재는 ‘하니프(حنيف, 복수형 حنفاء)’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신교를 거부하고 아브라함의 순수한 유일신 신앙을 추구했다고 전해지는 개인들입니다. 유대교나 기독교에 공식적으로 귀의하지는 않았지만,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유일한 신을 탐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슬람 전통은 와라카 이븐 나우팔(Waraqa ibn Nawfal), 자이드 이븐 아므르 이븐 누파일(Zayd ibn Amr ibn Nufayl) 등을 대표적인 하니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와라카는 무함마드의 첫 아내 카디자의 사촌으로,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를 받았을 때 그것이 진정한 예언자적 경험이라고 확인해 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과 구전 전통: 아랍 시의 황금기
시인의 사회적 역할
자힐리야 시대는 아랍 문학사에서 ‘시의 황금기’로 불립니다. 문자가 거의 사용되지 않던 구전 사회에서 시(شعر, 쉬으르)는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으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시인(شاعر, 샤이르)은 부족의 대변자이자 홍보 담당자였습니다. 그의 찬시(مدح, 마드흐)는 부족의 명성을 높이고, 풍자시(هجاء, 히자으)는 적 부족의 위신을 깎아내렸습니다. 전투 직전에 시인이 나서서 적을 조롱하고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은 실제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언어적 전쟁’이었습니다. 뛰어난 시인의 풍자시 한 편은 적 부족에게 물리적 패배보다 더 큰 치욕을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아랍어의 풍부한 어휘와 정교한 문법 체계는 이러한 구전 시 전통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시의 운율(바흐르, بحر)은 엄격한 규칙을 따랐으며, 8세기 학자 알할릴 이븐 아흐마드(al-Khalil ibn Ahmad)는 후대에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16가지 운율 패턴을 정리했습니다. 이 정교한 운율 체계는 자힐리야 시인들이 이미 암묵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무알라카트: 카바에 걸린 시
자힐리야 시의 최고봉은 ‘무알라카트(المعلقات)’로 불리는 일곱(혹은 열) 편의 장시입니다. ‘무알라카트’는 ‘걸린 것들’이라는 뜻으로, 전통에 따르면 우카즈 시장의 시 대회에서 우승한 작품이 카바 신전 벽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 전통의 역사적 사실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이 시들이 자힐리야 시대 아랍 시의 정수를 대표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무알라카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임루울카이스(امرؤ القيس)의 시입니다. “멈추어라, 함께 울자(قفا نبك)”로 시작하는 이 장시는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하여, 사막의 풍경 묘사, 말과 사냥에 대한 생생한 서술로 이어지며, 자힐리야 시의 전형적 구조인 ‘카시다(قصيدة)’ 형식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카시다의 전형적 구조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나시브(نسيب)’ 또는 ‘아틀랄(أطلال, 폐허)’ 부분에서 시인은 옛 연인이 떠나간 야영지의 흔적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슬퍼합니다. 둘째, ‘라힐(رحيل, 여행)’ 부분에서 시인은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며, 이 과정에서 자연의 경관과 동물들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셋째, 시의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시인의 실제 목적, 즉 부족에 대한 찬양, 적에 대한 풍자, 또는 개인적 용맹의 자랑이 펼쳐집니다.
무알라카트 시인들 중에는 안타라 이븐 샤다드(عنترة بن شداد)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인 안타라는 처음에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전투에서의 초인적 용맹으로 자유인 지위를 얻었고, 사촌 아블라(Abla)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한 시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후대에 대중적 영웅 서사시 ‘시라트 안타라(سيرة عنترة)’로 확대 각색되어 아랍 민중 문학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주하이르 이븐 아비 술마(زهير بن أبي سلمى)의 무알라카는 도덕적 성찰과 평화에 대한 호소로 유명합니다. 다히스-가브라 전쟁의 종결을 중재한 두 족장을 찬양하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노래한 이 시는 자힐리야 시가 단순한 자기 과시를 넘어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을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웅변과 산문 전통
시 외에도 웅변(خطابة, 히타바)은 자힐리야 시대의 중요한 언어 예술이었습니다. 부족 집회에서의 연설, 전쟁 전 사기 진작 연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의 의례적 연설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뛰어난 웅변가(하팁, خطيب)는 시인만큼이나 존경받았습니다.
속담(مثل, 마살)과 격언도 풍부했습니다. 이 속담들은 사막 생활의 지혜를 응축한 것으로, “낙타를 묶어두고 알라에게 맡겨라(اعقلها وتوكل)”와 같은 표현은 오늘날까지 일상에서 사용됩니다. 이런 속담들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수집·정리되었으며, 아랍 문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회적 관행과 윤리 체계
환대의 전통
사막 환경에서 낯선 여행자에 대한 환대(ضيافة, 디야파)는 생존과 직결된 절대적 의무였습니다. 길을 잃은 여행자가 텐트를 찾아왔을 때 음식과 물,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윤리 규범이었습니다. 관대한 환대는 명예의 원천이었고, 인색함은 가장 치욕적인 결함이었습니다.
환대의 전통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인물은 하팀 알타이(حاتم الطائي)입니다. 타이(Tayy) 부족의 족장이었던 하팀은 극단적인 관대함으로 전설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손님이 방문하면 자신의 마지막 낙타까지 도축해서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의 이름은 아랍 문화에서 관대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팀보다 관대하다”는 표현은 오늘날에도 최고의 칭찬으로 사용됩니다.
환대에는 일정한 의례가 따랐습니다. 손님은 3일간 주인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었으며, 이 기간 동안 손님의 정체나 방문 목적을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습니다. 손님이 떠날 때는 안전한 곳까지 호위를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러한 환대의 전통은 이슬람 시대에도 계승되었으며, 오늘날 아랍 문화의 핵심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여성의 지위: 복잡한 현실
자힐리야 시대 아라비아 여성의 지위는 단순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입니다. 이슬람 전통은 자힐리야 시대를 여성 억압의 시대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여아 생매장(وأد البنات, 와으드 알바나트) 관행이 대표적으로 언급됩니다. 일부 부족에서 딸이 태어나면 수치로 여기고 생매장했다는 이 관행은 꾸란에서도 강하게 비난되고 있습니다(81장 8~9절).
그러나 이것이 자힐리야 시대 여성의 전부는 아닙니다. 실제로 일부 여성들은 상당한 경제적·사회적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무함마드의 첫 아내 카디자(خديجة)는 메카의 성공적인 여성 상인으로, 자신의 대상을 운영하며 무함마드를 고용했고, 자신이 먼저 결혼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자힐리야 시대 여성이 경제적 독립과 결혼에서의 주체성을 가질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혼 형태도 다양했습니다. 일부다처는 흔했지만 그 양상은 부족과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습니다. ‘무트아(متعة, 임시 결혼)’라 불리는 기한부 결혼이 존재했으며, 일부 부족에서는 모계적 결혼 형태도 관찰됩니다. 여성이 남편을 선택하고 이혼을 주도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텐트의 방향을 바꾸어 남편의 출입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혼을 선언하는 관행이 알려져 있습니다.
전장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전투 후방에서 북을 치고 시를 낭송하며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웠고, 부상병을 치료했습니다. 때로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 전사도 있었으나 이는 예외적 경우였습니다. 시인 알한사(الخنساء)는 형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비가(رثاء, 리싸으)로 자힐리야 시대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노예제와 사회 계층
자힐리야 시대의 아라비아 사회는 자유인과 노예로 나뉘었습니다. 노예는 전쟁 포로, 부채 불이행자, 또는 노예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가정 내 노동, 목축, 때로는 전투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예의 상태가 완전히 고정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었고, 해방된 노예(마울라, مولى)는 주인의 부족에 편입되어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얻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시인 안타라의 경우처럼, 뛰어난 능력으로 사회적 상승을 이룬 노예 출신의 사례도 있습니다.
한편, ‘사으룩(صعلوك)’이라 불리는 사회적 낙오자 집단도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부족에서 추방되었거나 자발적으로 이탈한 사람들로, 사막에서 도적 생활을 하며 기존 사회 질서에 도전했습니다. 시인 알샨파라(الشنفرى)와 타으아바타 샤란(تأبط شرًّا) 등은 이 사으룩 출신의 유명한 시인들로, 자유롭고 반항적인 삶을 노래한 그들의 시는 아랍 문학의 독특한 장르를 형성합니다.
6세기 아라비아의 지정학적 상황
비잔틴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직전의 6세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세계의 두 초강대국인 비잔틴(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에 끼인 완충 지대였습니다. 두 제국은 직접적으로 아라비아 내륙을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아랍 부족들을 대리 세력으로 활용하여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2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잔틴 제국은 시리아 남부의 가산(Ghassan) 왕국을 속국으로 두어 아라비아 방면의 완충 지대로 삼았습니다. 가산 왕조는 단성론 기독교를 신봉했으며, 비잔틴을 위해 페르시아 측 아랍 부족들과 끊임없이 충돌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라크 남부의 라크미드(Lakhmid) 왕국(히라 왕국)을 후원했습니다. 라크미드 왕조의 수도 히라(al-Hira)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중심지이자 아랍 문학의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두 제국의 대리전은 아라비아 내부의 부족 정치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족들은 상황에 따라 한쪽 편에 섰다가 다른 쪽으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족 간 동맹과 적대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예멘의 혼란과 코끼리의 해
6세기 남부 아라비아(예멘)의 정치적 격변은 아라비아 반도 전체의 역사적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525년, 유대교도 힘야르 왕 두 누와스의 기독교도 박해를 구실로, 에티오피아의 악숨(Aksum) 왕국이 예멘을 침공하여 정복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지배는 약 5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에 예멘 총독 아브라하(Abraha)는 기독교 대성당을 건설하고, 메카의 카바에 대항하는 종교적 중심지를 만들려 했습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하는 코끼리 군단을 이끌고 메카를 공격하려 했으나, 신의 개입으로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코끼리의 해(عام الفيل, 아무 알필)’로, 무함마드가 태어난 해(약 570년)와 동일시됩니다. 꾸란 제105장(코끼리 장)은 이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떼 지어 날아온 새들이 불타는 돌을 던져 아브라하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묘사합니다. 역사학적으로는 이 원정의 실패 원인이 천연두 같은 전염병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575년경, 사산조 페르시아가 예멘의 에티오피아 세력을 축출하고 간접 지배를 확립합니다. 이로써 예멘은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고대 남부 아라비아 문명의 독자적 전통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변동은 히자즈 지역, 특히 메카의 상대적 중요성을 더욱 높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메카의 부상: 쿠라이시와 내부 권력 투쟁
6세기 후반,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은 주변 강대국들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여갔습니다. 쿠라이시 내부에서는 여러 가문 간의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크게 하심(Hashim) 가문과 우마이야(Umayya) 가문의 경쟁이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하심은 메카의 교역 체계를 확립한 인물로 존경받았고, 그의 가문은 카바의 급수·급식 책임을 맡으며 종교적 명망을 쌓았습니다. 하심의 손자가 바로 무함마드의 조부인 압둘무탈리브(Abd al-Muttalib)로, 그는 잠잠(Zamzam) 우물을 재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며, 메카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반면 우마이야 가문은 상업적 부를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갔습니다. 이 두 가문의 경쟁은 이슬람 시대에도 계속되어, 무함마드(하심 가문)와 아부 수프얀(우마이야 가문)의 갈등, 그리고 후대의 우마이야 왕조 대 압바스 왕조(하심 계통)의 권력 투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무함마드가 태어날 무렵의 메카는, 상업적 번영을 누리면서도 깊은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상인 귀족 가문이 부를 독점하고, 전통적인 부족적 연대와 상호 부조의 가치는 약화되어갔습니다. 가난한 부족원, 고아, 과부, 노예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체계가 무너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위기감은 새로운 종교적·도덕적 메시지에 대한 갈증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자힐리야 시대의 일상생활
의식주와 생활 문화
베두인의 주거는 검은 염소 털로 짠 텐트(بيت الشعر, 바이트 알샤아르, ‘머리카락의 집’)였습니다. 이 텐트는 이동이 용이하면서도 사막의 열기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실용적 구조물이었습니다. 텐트는 보통 남녀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손님 접대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음식은 주로 낙타와 양의 젖, 대추야자, 보리빵 등이었습니다. 고기는 손님이 방문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먹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사리드(ثريد)’라 불리는 고기 국물에 적신 빵 요리는 가장 인기 있는 별식이었고, 무함마드도 이 음식을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술(나비드, نبيذ)은 대추야자로 만든 것이 가장 흔했으며, 포도주는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수입되었습니다. 음주는 자힐리야 시대에 매우 보편적이었으며, 시에서도 술과 음주 모임이 자주 노래되었습니다.
의복은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달랐습니다. 유목민은 주로 거친 양모나 낙타 털 직물로 만든 옷을 입었고, 도시 거주민은 예멘이나 시리아에서 수입된 면직물이나 비단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남성의 기본 복장은 긴 셔츠(카미스, قميص)와 외투(리다으, رداء)였으며, 머리에는 천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오락과 여가
자힐리야 시대 아라비아인들은 다양한 오락을 즐겼습니다. 경마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습니다. 아랍 말은 그 속도와 지구력으로 고대 세계에서 높이 평가되었으며, 말의 혈통은 세심하게 관리되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아라비안 호스의 혈통은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도박(마이시르, ميسر)도 매우 성행했습니다. 화살을 이용한 도박이 가장 흔한 형태였으며, 도박에서 이긴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러한 도박-재분배 관행은 부의 사회적 순환 기능을 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동시에 과도한 도박으로 인한 파산과 사회적 갈등도 심각했습니다. 이슬람이 도박과 음주를 금지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폐해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사막의 유목민에게 별은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자 계절 변화를 예고하는 달력이었습니다. 아랍인들은 별자리와 개별 항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축적했으며, 오늘날에도 알데바란(Aldebaran), 베텔게우스(Betelgeuse), 리겔(Rigel) 등 많은 항성의 이름이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은 이러한 전통의 유산입니다.
자힐리야에서 이슬람으로: 전환기의 징후들
위기의 시대
무함마드 등장 직전의 아라비아, 특히 메카는 복합적 위기의 시대를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 전통적 부족 체계의 균열입니다. 상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혈연에 기반한 상호 부조 체계가 약화되었고, 부의 편중이 심화되었습니다. 둘째, 종교적 혼란입니다. 전통적 다신교가 지적·영적 만족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침투하고, 하니프 같은 개인적 탐구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셋째, 지정학적 불안정입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대립이 격화되고 예멘이 외세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아라비아인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 위기는 새로운 사회적·종교적 질서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습니다. 기존의 부족 분열을 넘어서는 통합 원리,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윤리 체계, 유일신 사상에 기반한 명확한 세계관 등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무함마드의 등장과 이슬람의 출현을 이해할 때, 그것이 결코 역사적 진공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힐리야 시대의 사회적·문화적 토양 위에서 자라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힐리야의 유산
이슬람은 자힐리야 시대를 ‘무지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 많은 관행들을 혁파했습니다. 우상 숭배, 여아 생매장, 혈수 복수의 연쇄, 과도한 음주와 도박 등이 금지되거나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슬람은 자힐리야의 많은 요소를 수용하고 변형하여 계승했습니다.
카바 순례는 우상을 제거한 뒤 이슬람의 핵심 의례인 하즈로 재정립되었습니다. 성월의 전투 금지 관행은 이슬람법에 편입되었습니다. 환대와 관대함의 가치는 이슬람 윤리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아랍어의 정교한 문학 전통은 꾸란의 언어적 표현에 영향을 미쳤고, 꾸란 자체가 아랍 문학의 최고봉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디야(혈전 배상금) 제도는 이슬람법(샤리아)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어 체계화되었습니다. 부족 회의(슈라)의 전통은 이슬람 정치론의 핵심 원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슬람은 자힐리야를 전면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계승하고 변형함으로써 아라비아인들이 수용 가능한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 무함마드와 이슬람의 탄생
자힐리야 시대의 아라비아는 결코 역사의 공백기가 아니었습니다. 정교한 부족 체계,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 풍부한 문학 전통, 다양한 종교적 실천이 공존하는 역동적 사회였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내부적 모순과 외부적 압력으로 깊은 변환의 압력을 받고 있던 사회이기도 했습니다.
이 토양 위에서, 약 570년 메카의 하심 가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이 아이는, 장성하여 카디자라는 부유한 여성 상인과 결혼하고, 40세에 히라 동굴에서 첫 계시를 받게 됩니다. 다음 15화에서는 무함마드의 생애와 이슬람의 탄생, 그리고 이 새로운 종교가 어떻게 자힐리야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라비아 역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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