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역사] 51/52화: 아랍의 봄: 중동을 뒤흔든 혁명의 도미노와 그 이후
들어가며 — 한 청년의 분신이 대륙을 흔들다
지난 50화에서 우리는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이 중동에 남긴 깊은 상흔을 살펴보았습니다.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은 독재 정권을 제거했지만 안정적인 대안을 심어주지는 못했고, 중동의 민중은 외부 개입과 내부 억압이라는 이중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런 억눌린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 바로 2010년 말부터 시작된 ‘아랍의 봄’입니다.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 소도시 시디 부지드(Sidi Bouzid)에서 스물여섯 살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Mohamed Bouazizi)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노점상으로 가족을 부양하던 그는 단속 공무원에게 과일 수레를 압수당하고 모욕을 받은 뒤, 시청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절망적인 행위가 튀니지 전역, 나아가 아랍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랍의 봄은 단순한 정치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축적된 경제적 불평등, 청년 실업, 정치적 억압, 부패에 대한 총체적 분노의 분출이었습니다. 이 51화에서는 아랍의 봄이 왜 일어났는지, 각국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중동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팩트에 기반하여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아랍의 봄, 왜 일어났는가 — 구조적 원인
경제적 좌절과 청년 실업
아랍의 봄이 발생한 2010년, 중동·북아프리카(MENA) 지역의 청년 실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 통계에 따르면 이 지역의 15~24세 실업률은 약 25~30%에 달했으며, 이집트에서는 대졸자의 실업률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튀니지의 경우 공식 실업률이 13% 안팎이었지만 내륙 지역과 청년층에서는 30%를 훨씬 넘겼습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은 소수의 권력층과 그에 연결된 기업인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 일가, 이집트의 무바라크 가문, 시리아의 아사드 일족과 그 측근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반면, 일반 시민들은 물가 상승과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식량 가격 급등은 이러한 불만을 한층 심화시켰습니다.
정치적 억압과 장기 독재
아랍의 봄이 발생한 국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수십 년간 이어진 장기 독재 체제였습니다. 튀니지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Zine El Abidine Ben Ali)는 1987년부터 23년간,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는 1981년부터 30년간,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는 1969년부터 42년간,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흐(Ali Abdullah Saleh)는 1978년부터 33년간, 시리아의 아사드 가문은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Hafez al-Assad) 이래 40년 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정권은 비밀경찰, 검열, 비상사태법을 통해 반대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1981년부터 2012년까지 비상사태법이 지속되었고, 시리아에서는 1963년부터 2011년까지 48년간 비상계엄이 유지되었습니다. 형식적인 선거가 치러지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정권 교체의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인구 구조와 정보 혁명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은 이른바 ‘유스 벌지(youth bulge)’ 현상이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30세 미만이었고, 이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지만 그에 걸맞은 일자리와 사회적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좌절감을 키웠습니다.
동시에 2000년대 들어 급속히 보급된 위성 TV(특히 알자지라), 인터넷, 소셜 미디어(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는 정보 통제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부아지지의 분신 장면은 휴대전화로 촬영되어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알자지라가 이를 방송하면서 튀니지 전역으로, 나아가 아랍 세계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독재 정권이 통제할 수 있었던 정보의 흐름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부패에 대한 분노
독재 정권의 부패는 시민들의 일상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튀니지에서 벤 알리의 부인 레일라 트라벨시(Leila Trabelsi)의 가문은 ‘튀니지의 마피아’로 불리며 국가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습니다. 위키리크스가 2010년 공개한 미국 외교 전문에는 벤 알리 일가의 부패를 상세히 기술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튀니지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아사드 대통령의 외사촌 라미 마흘루프(Rami Makhlouf)가 시리아 경제의 60%를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습니다.
튀니지 — 재스민 혁명, 유일한 성공 사례
혁명의 발화와 벤 알리의 몰락
부아지지의 분신 이후 시디 부지드에서 시작된 시위는 빠르게 튀니지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내륙 소도시들의 경제적 불만이 주된 동력이었지만, 곧 수도 튀니스를 포함한 연안 대도시로 번지면서 정치적 자유와 벤 알리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시위대의 구호는 명확했습니다. “디가주!(Dégage! — 꺼져라!)”, “알샤브 유리드 이스카트 알니잠!(الشعب يريد إسقاط النظام — 국민은 체제 타도를 원한다!)”
벤 알리 정권은 초기에 무력 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경찰과 보안대가 실탄 사격을 가했고, 시위 과정에서 최소 3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시위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격렬해졌습니다. 결정적 전환점은 군부의 태도였습니다. 튀니지 군 참모총장 라시드 암마르(Rachid Ammar)는 시위대를 향한 발포 명령을 거부했고, 이는 벤 알리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2011년 1월 14일, 집권 23년 만에 벤 알리는 가족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했습니다. 독재자가 민중의 힘에 의해 쫓겨난 것은 튀니지 역사상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아랍 세계 전체에 전율을 안겼습니다. 이 혁명은 ‘재스민 혁명(Jasmine Revolution)’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험난한 민주화 이행
벤 알리 축출 이후 튀니지는 아랍의 봄 국가들 중 가장 순조로운 민주화 과정을 밟았습니다. 2011년 10월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Ennahda)가 제1당이 되었습니다. 엔나흐다의 지도자 라시드 간누시(Rachid Ghannouchi)는 세속 정당들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했는데, 이는 이슬람주의 정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한 드문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이행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세속주의 야당 지도자 슈크리 벨라이드(Chokri Belaid)와 무함마드 브라흐미(Mohamed Brahmi)가 잇따라 암살되면서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이 위기를 해결한 것은 튀니지 시민사회의 저력이었습니다. 노동조합(UGTT), 산업연맹(UTICA), 인권단체(LTDH), 변호사회 등 4개 시민사회 조직으로 구성된 ‘국민대화 4자 위원회(Quartet du dialogue national)’가 정치적 중재에 나서 위기를 타개했습니다. 이 4자 위원회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2014년 1월 새 헌법이 채택되었는데, 이 헌법은 아랍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남녀 평등, 종교의 자유, 사법부 독립, 지방 분권 등을 명시했습니다. 같은 해 치러진 총선과 대선에서 세속주의 정당 니다 투네스(Nidaa Tounes)의 베지 카이드 에셉시(Beji Caid Essebsi)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튀니지 민주주의의 위기 — 카이스 사이에드의 등장
그러나 튀니지의 민주주의 실험은 경제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혁명 이후에도 실업률은 개선되지 않았고, 관광 산업은 2015년 바르도 국립박물관 테러(22명 사망)와 수스 해변 테러(38명 사망) 등 IS 연계 테러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잦은 내각 교체와 정당 간 갈등으로 효율적인 국정 운영이 어려웠습니다.
2019년 대선에서 법학 교수 출신의 정치 신인 카이스 사이에드(Kais Saied)가 72.7%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반부패와 체제 개혁을 내세운 그는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깊은 환멸을 등에 업었습니다. 그러나 2021년 7월 25일 사이에드는 의회를 정지시키고 총리를 해임하는 초헌법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후 2022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한 새 헌법을 통과시켰고, 사실상 일인 지배 체제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야당 인사들에 대한 체포와 기소가 이어졌고, 엔나흐다를 비롯한 정당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아랍의 봄의 유일한 민주주의 성공 사례로 꼽히던 튀니지마저 권위주의로 역행하는 듯한 이 상황은 많은 관찰자들에게 깊은 우려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집트 — 타흐리르 광장의 열기와 좌절
18일간의 혁명
튀니지의 성공에 고무된 이집트 시민들은 2011년 1월 25일, ‘경찰의 날’에 맞춰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 광장은 순식간에 수십만 명이 모이는 혁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빵을, 자유를, 사회 정의를 원한다(عيش، حرية، عدالة اجتماعية)’라는 구호가 광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무바라크 정권은 인터넷과 휴대전화 통신을 차단하고, 경찰력을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1월 28일 ‘분노의 금요일’에는 전국적으로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고, 경찰이 퇴각한 뒤에는 군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군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지 않았고, “군은 국민에게 총을 겨누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최종적으로 무바라크의 퇴진을 불가피하게 만들었습니다.
2011년 2월 11일, 3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무바라크가 사임했습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전 세계 미디어가 이 역사적 순간을 생중계했습니다. 시위 과정에서 약 840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무르시 정부와 군부의 귀환
무바라크 퇴진 후 군 최고위원회(SCAF)가 과도 정부를 운영했고, 2012년 6월 대선에서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 소속 무함마드 무르시(Mohamed Morsi)가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르시는 집권 직후부터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2012년 11월 대통령 포고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사법 심사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이슬람주의 색채가 강한 헌법 초안을 밀어붙여 세속주의 세력과 기독교 콥트 교도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경제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고, 2013년 6월 30일 무르시 취임 1주년에 맞춰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타마로드(Tamarod, 반란)’ 운동이 수집한 무르시 퇴진 청원 서명은 2,200만 건에 달했다고 주장되었습니다. 2013년 7월 3일, 국방장관 압델 파타흐 엘시시(Abdel Fattah el-Sisi) 장군이 쿠데타를 단행하여 무르시를 축출했습니다.
쿠데타 이후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들은 카이로의 라바 알아다위야(Rabaa al-Adawiya) 광장에서 연좌 시위를 벌였습니다. 2013년 8월 14일, 군과 경찰은 이 연좌 시위를 무력으로 해산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최소 817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했으며, 이를 ‘현대 세계사에서 단일 사건으로 가장 큰 규모의 시위대 학살 중 하나’로 규정했습니다.
엘시시는 2014년 대선에서 96.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이후 무바라크 시대보다 더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무슬림형제단은 테러 단체로 지정되었고, 무르시는 수감 중 2019년 법정에서 사망했습니다. 언론 통제, 반체제 인사 투옥, 시민사회 탄압이 심화되었고, 이집트의 민주주의 실험은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리비아 — 카다피의 종말과 국가 붕괴
42년 독재의 끝
리비아의 봉기는 2011년 2월 15일 벵가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권 변호사의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가 급속히 반정부 봉기로 확대되었고, 카다피 정권은 즉각 군사력을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카다피는 TV 연설에서 시위대를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집집마다 찾아가 청소하겠다(زنقة زنقة)”고 위협했습니다.
카다피 군대가 벵가지를 향해 진격하면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임박했다는 우려가 고조되었습니다. 2011년 3월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1973호를 채택하여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민간인 보호를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승인했습니다. 이 결의안에는 러시아, 중국, 독일, 인도, 브라질이 기권했습니다.
3월 19일부터 프랑스, 영국, 미국 주도의 NATO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약 7개월간의 내전과 NATO 공습 끝에 반군 세력은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했고,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고향 시르트(Sirte) 인근에서 도주하다 반군에 의해 사로잡힌 뒤 살해되었습니다. 42년간의 독재는 끝났지만, 리비아의 비극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분열과 내전 — 두 개의 정부
카다피 이후 리비아는 통합된 국가 기관의 부재라는 근본적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카다피는 42년간 정당, 의회, 독립적 사법부 등 제도적 기반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부족 간 경쟁을 통해 통치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진 뒤 남은 것은 제도적 공백뿐이었습니다. 내전 기간에 형성된 수백 개의 민병대는 무장해제를 거부했고,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2014년부터 리비아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분열되었습니다. 서부 트리폴리에는 유엔이 승인한 국민합의정부(GNA)가, 동부 토브루크에는 하원(HoR)과 동맹한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장군의 리비아국민군(LNA)이 자리 잡았습니다. 하프타르는 이슬람 무장 세력 소탕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리비아의 석유 자원 통제권을 놓고 벌이는 권력 투쟁이었습니다.
리비아 분쟁에는 외부 세력의 개입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튀르키예와 카타르는 GNA를, 이집트·UAE·사우디아라비아·러시아(바그너 그룹 민간군사기업 파견 포함)는 하프타르를 지원했습니다.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는 사실상 무시되었습니다. 2019년 4월 하프타르가 트리폴리 공격을 개시했지만, 튀르키예의 군사 지원을 받은 GNA가 이를 저지했고, 2020년 10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리비아 내전은 수만 명의 사망자, 수십만 명의 국내 실향민, 그리고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는 불법 이주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고, 인신매매와 현대판 노예 시장까지 보고되었습니다. 2026년 현재까지도 리비아는 통합 정부 수립과 총선 실시를 놓고 교착 상태에 있습니다.
시리아 — 21세기 최악의 인도주의 재앙
평화 시위에서 내전으로
시리아의 봉기는 2011년 3월 남부 도시 다라(Daraa)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학교 벽에 반정부 낙서를 한 10대 소년들이 체포되어 고문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항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 정권은 시위대에 발포했고, 이는 더 큰 분노를 촉발했습니다. 시위는 홈스(Homs), 하마(Hama), 이들리브(Idlib), 알레포(Aleppo), 다마스쿠스 교외 등 시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아사드 정권은 시위를 ‘외부 세력의 음모’와 ‘무장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규정하며 군사적 진압에 나섰습니다. 탱크, 포병, 전투기가 민간 지역에 투입되었고, 정부군에서 이탈한 군인들이 2011년 7월 ‘자유시리아군(Free Syrian Army, FSA)’을 결성하면서 시위는 본격적인 무장 내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내전의 복잡한 다층 구조
시리아 내전은 곧 단순한 정부 대 반군의 구도를 넘어 극도로 복잡한 다층적 분쟁으로 변모했습니다. 주요 행위자만 나열해도 그 복잡성이 드러납니다.
- 아사드 정권: 러시아(2015년 9월 직접 군사 개입), 이란, 레바논 헤즈볼라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러시아의 공군력과 이란 혁명수비대 및 시아파 민병대의 지상군은 아사드 정권의 생존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 반정부 세력: 자유시리아군(FSA),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아흐라르 알샴, 자이시 알이슬람 등), 알카에다 계열의 누스라 전선(이후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으로 개명) 등 수십 개 무장 조직이 난립했습니다. 이들은 때로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 IS(이슬람국가): 2013~2014년 이라크와 시리아 동부의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고 ‘칼리프국’을 선포했습니다. 이들의 잔혹한 통치와 테러 영상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습니다.
- 쿠르드 세력(SDF/YPG): 시리아 북동부를 장악하며 사실상의 자치를 구축했습니다. 미국 주도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IS 격퇴의 핵심 지상군 역할을 했지만, 튀르키예로부터는 PKK의 연장선으로 간주되어 적대시되었습니다.
- 외부 세력: 미국(반IS 연합, 쿠르드 지원), 튀르키예(반군·쿠르드 반대), 러시아(아사드 지원), 이란(아사드 지원), 걸프 국가들(반군 지원), 이스라엘(이란 세력 견제 공습) 등이 개입했습니다.
화학무기 공격과 국제사회의 ‘레드라인’
시리아 내전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는 화학무기 사용이었습니다. 2013년 8월 21일 다마스쿠스 교외 구타(Ghouta) 지역에서 사린 가스 공격이 발생하여 수백 명이 사망했습니다. 유엔 조사단은 사린 가스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했으며, 서방 국가들과 다수의 독립적 분석가들은 아사드 정권의 소행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전에 화학무기 사용을 ‘레드라인’으로 규정했으나, 군사적 대응 대신 러시아의 중재로 시리아의 화학무기 폐기 합의를 택했습니다. 이 결정은 미국의 중동 정책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후에도 화학무기 공격은 반복되었으며, 2017년 4월 이들리브주 칸 셰이쿤(Khan Shaykhun) 공격과 2018년 4월 두마(Douma) 공격이 대표적입니다.
인도주의 재앙의 규모
시리아 내전의 인적 피해는 21세기 최악의 수준입니다. 유엔 추정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24년까지 약 50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시리아 전쟁 전 인구 약 2,20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강제 이주를 경험했습니다. 약 670만 명이 국내 실향민이 되었고, 약 660만 명이 해외로 탈출하여 난민이 되었습니다. 튀르키예가 약 360만 명, 레바논이 약 150만 명, 요르단이 약 66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으며, 2015년 유럽으로 향하는 대규모 난민 행렬은 유럽 정치 지형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알레포는 시리아 내전의 파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때 시리아 최대 도시이자 경제 중심지였던 알레포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와 포위전을 겪었습니다. 도시의 역사적 구시가지와 거대한 수크(시장)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병원과 학교에 대한 폭격이 반복되었습니다.

시리아의 현재 — 아사드 정권의 붕괴와 불확실한 미래
2024년 말~2025년 초, 시리아 정세는 또 한 번 급변했습니다.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 주도의 반군 연합이 이들리브에서 출발하여 빠르게 알레포, 하마, 홈스를 점령하며 남진했고,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에 입성했습니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러시아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아사드 가문의 54년간(하페즈 알아사드 1970년 쿠데타 이후)의 시리아 통치가 막을 내렸습니다.
HTS의 지도자 아부 무함마드 알줄라니(Abu Muhammad al-Julani, 본명 아흐마드 알샤라)는 과도 정부 수립을 선언하며 포용적 통치를 약속했으나, 시리아의 앞길에는 여전히 거대한 불확실성이 놓여 있습니다. 쿠르드 자치 지역의 지위, 튀르키예의 군사 작전, 수백 개 무장 세력의 통합, 대규모 난민의 귀환, 전후 재건 등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아사드 정권의 종말이 시리아 시민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릅니다.
예멘 — 잊혀진 전쟁,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
살레흐 퇴진과 정치적 이행의 실패
예멘에서 아랍의 봄의 불길은 2011년 1월부터 수도 사나(Sanaa)를 중심으로 타올랐습니다. 33년간 집권해온 알리 압둘라 살레흐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요구가 거세졌고, 2011년 6월 살레흐가 대통령궁 폭격으로 부상을 입고 사우디아라비아로 치료를 떠나면서 국면이 전환되었습니다. 결국 걸프협력회의(GCC)의 중재로 살레흐는 2011년 11월 권력 이양 합의에 서명했고, 2012년 2월 부통령이었던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Abdrabbuh Mansur Hadi)가 단독 후보로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하디 정부 하에서 국민대화회의(NDC)가 2013~2014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예멘을 6개 연방 지역으로 나누는 안이 도출되자 이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시아파 자이드파 무장 세력인 후시(Houthi, 공식 명칭 안사룰라 — Ansar Allah)는 연방제안이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서 자신들을 배제한다며 반발했습니다.
후시의 수도 장악과 사우디 군사 개입
2014년 9월 후시 세력은 수도 사나를 장악했습니다. 놀랍게도 이전까지 적이었던 살레흐가 후시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권력 복귀를 노린 편의적 결합이었습니다. 2015년 1월 후시가 대통령궁을 점령하자 하디는 남부 항구도시 아덴으로 탈출했다가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습니다.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아랍 연합군이 ‘결의의 폭풍(Operation Decisive Storm)’ 작전을 개시하며 예멘 내전에 직접 군사 개입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후시 세력의 배후에 이란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란 영향력의 남방 확대를 차단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UAE도 연합군의 핵심 구성원으로 참여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사우디에 무기를 판매하고 정보·군수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의 공습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참혹한 민간인 피해를 야기했습니다. 결혼식장, 병원, 학교, 장례식장, 버스 등이 폭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2018년 8월 사다(Sa’dah)주에서 학교 버스가 연합군 공습을 받아 아이 40명을 포함해 51명이 사망한 사건은 국제적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사용된 폭탄은 미국 제조 MK-82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
유엔은 예멘 사태를 반복적으로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로 규정해왔습니다. 전쟁 전 이미 아랍 세계의 최빈국이었던 예멘은 전쟁으로 인해 파국적 상황에 빠졌습니다. 유엔 데이터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약 15만 명 이상이 직접적 전투로 사망했고, 간접적 사망(기아, 질병, 의료 붕괴)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수십만 명에 달합니다.
예멘 인구 약 3,300만 명 중 2,100만 명 이상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했으며, 1,600만 명 이상이 식량 불안정 상태,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에 시달렸습니다. 2016~2017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콜레라 유행이 발생하여 100만 건 이상의 의심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항구 도시 호데이다(Hodeidah)에 대한 연합군의 봉쇄는 수입 식량과 의약품의 반입을 심각하게 제한했고, 이는 기아 위기를 가중시켰습니다.
2022년 4월 유엔 중재로 전국적 휴전이 성립되었고, 비록 공식 연장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규모 전투는 상당 부분 감소했습니다. 2023년 사우디아라비아와 후시 사이의 직접 대화가 시작되었고, 이란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2023년 3월 중국 중재)가 예멘 평화 프로세스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한 이후 후시가 홍해에서 이스라엘 관련 선박(및 사실상 국제 상선 전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상황은 다시 복잡해졌습니다.
후시와 홍해 위기
2023년 11월부터 후시는 가자 전쟁에 대한 연대를 명분으로 홍해와 바브 알만답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에 대한 미사일·드론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세계 해상 무역의 약 12%가 통과하는 수에즈 운하 경로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으며, 주요 해운사들이 항로를 아프리카 희망봉 우회로 변경하면서 글로벌 물류 비용이 급등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2024년 1월부터 후시 군사 시설에 대한 공습을 실시했지만, 후시의 공격은 202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홍해 위기는 예멘 내전이 어떻게 지역적·글로벌 차원의 안보 문제로 확대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바레인 — 진압된 봉기
아랍의 봄의 물결은 걸프 왕정 국가인 바레인에도 닿았습니다. 2011년 2월 시아파 다수 주민들이 수도 마나마의 진주 광장(Pearl Roundabout)에서 정치 개혁과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바레인의 수니파 알칼리파(Al Khalifa) 왕가는 인구의 약 60~70%를 차지하는 시아파 시민들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오랜 기간 차별해왔습니다.
2011년 3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걸프협력회의(GCC)의 반도방위군(Peninsula Shield Force)이 바레인에 진입하여 시위 진압을 지원했습니다. 진주 광장의 상징적인 진주 기념탑은 철거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으며, 시아파 모스크 수십 곳이 파괴되었습니다. 바레인 정부가 설치한 독립조사위원회(BICI, 바시오니 위원회)는 과도한 무력 사용과 조직적 고문이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바레인의 사례는 걸프 왕정 국가들이 내부 불안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국 인접 지역에서 시아파 주도의 변화를 어떻게 차단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서방 국가들은 바레인에 미 해군 제5함대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전략적 이해 때문에 바레인의 인권 상황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아랍의 봄이 남긴 것 — 결산과 교훈

나라별 결과의 극단적 차이
아랍의 봄은 비슷한 원인에서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나라마다 극단적으로 달랐습니다.
- 튀니지: 유일한 민주화 ‘성공’ 사례였으나, 2021년 이후 권위주의 역행이 진행 중.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경제적 성과 없이는 지속되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 이집트: 민주적 선거 → 이슬람주의 정부 → 군부 쿠데타 → 무바라크 시대 이상의 권위주의 체제로의 회귀. 군부의 구조적 권력과 시민사회의 미성숙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 리비아: 독재자 제거 후 국가 붕괴와 지속적 내전. 외부 군사 개입이 정권 교체는 달성했지만 ‘그 다음’에 대한 계획 없이 실행된 결과였습니다.
- 시리아: 약 50만 명 이상 사망, 1,200만 명 이상 강제 이주. 내전은 지역·강대국 대리전으로 변질되었고, 2024년 말 아사드 정권이 결국 붕괴했지만 재건과 화해의 길은 험난합니다.
- 예멘: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 분쟁은 지역 강대국(사우디·이란)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고, 2020년대에도 완전한 평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 바레인: 걸프 왕정의 연대로 봉기가 진압되어, ‘군주제의 예외’가 유지되었습니다.
왜 결과가 이렇게 달라졌는가
학자들은 아랍의 봄의 상이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요인을 분석해왔습니다.
첫째, 군부의 역할입니다. 튀니지에서 군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고 정치적 이행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집트에서 군은 거대한 경제적 이해관계(GDP의 최대 40%를 군 관련 기업이 차지한다는 추정)를 가진 행위자였고, 결국 직접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시리아와 리비아에서 군은 정권과 일체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권 방어를 위해 싸웠고, 이탈한 군인들이 반군을 형성하면서 내전으로 치달았습니다.
둘째, 사회 구조의 동질성입니다. 튀니지는 종파적·부족적 분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강력한 노동조합과 시민사회 전통이 있었습니다. 반면 리비아는 부족 연합체에 가까운 사회였고, 시리아·예멘·바레인은 심각한 종파적 분열(수니-시아, 아랍-쿠르드 등)을 안고 있어 봉기가 종파 갈등으로 변질되기 쉬웠습니다.
셋째, 외부 개입의 양상입니다. 리비아에서 NATO의 군사 개입은 카다피를 제거했지만 이후의 국가 건설은 방기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러시아·이란이 아사드를 지탱하고 서방·걸프 국가들이 반군을 지원하면서 분쟁이 장기화·국제화되었습니다. 예멘에서 사우디의 군사 개입은 인도주의 위기를 심화시켰습니다. 바레인에서는 사우디의 신속한 군사 개입이 봉기를 조기에 진압했습니다.
넷째, 석유 자원의 역할입니다. 석유 부국인 걸프 왕정 국가들(사우디, UAE, 카타르, 쿠웨이트 등)은 풍부한 재정을 활용하여 복지 지출을 늘리고 봉급을 인상하는 방식으로 내부 불만을 흡수했습니다. 사우디의 압둘라 국왕은 2011년 3월 1,300억 달러 규모의 복지 패키지를 발표하여 국내의 잠재적 시위를 선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소셜 미디어의 빛과 그림자
아랍의 봄은 소셜 미디어가 정치 변동에 미치는 영향을 세계에 처음으로 대규모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시위 조직, 정보 공유,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의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집트의 ‘4월 6일 청년운동’이나 ‘우리 모두 칼리드 사이드다(We Are All Khaled Said)’ 페이스북 페이지는 수십만 명을 동원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습니다. 혁명을 조직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혁명 이후의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고 제도를 건설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분노를 증폭시키고 대중을 동원하는 데 탁월하지만, 타협과 점진적 제도 구축에 필요한 인내와 복잡한 협상 과정을 대체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독재 정권들은 곧 소셜 미디어를 감시·통제·역정보의 도구로 활용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슬람주의 정치의 시험대
아랍의 봄은 이슬람주의 정치 세력에게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집권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튀니지의 엔나흐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모로코의 정의개발당(PJD) 등이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수십 년간 지하에서 활동하며 사회 서비스 제공을 통해 풀뿌리 지지 기반을 쌓아온 이들에게 민주화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사례가 보여주듯, 선거 승리와 효과적 통치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무르시의 무슬림형제단 정부는 포용적 통치에 실패했고, 이는 군부 쿠데타의 구실을 제공했습니다. 반면 튀니지의 엔나흐다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며 세속 세력과의 연립을 택했고, 이것이 튀니지 이행의 초기 성공에 기여했습니다. 이슬람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아랍의 봄이 남긴 가장 중요한 지적 유산 중 하나입니다.
여성의 역할과 그 이후
아랍의 봄에서 여성들의 참여는 두드러졌습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남녀가 함께 시위했고, 예멘의 타와쿨 카르만(Tawakkol Karman)은 201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아랍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튀니지에서는 혁명 이후 제정된 2014년 헌법에 남녀 평등이 명시되었고, 2017년에는 무슬림 여성이 비무슬림 남성과 결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법적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랍의 봄 이후 여성의 상황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혁명 과정과 이후에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빈발했고, 시리아·리비아·예멘의 내전은 여성에게 특히 가혹했습니다. 분쟁 지역에서의 성폭력, 조혼, 교육 기회 박탈 등의 문제가 심화되었습니다.
난민 위기와 유럽에 미친 영향
아랍의 봄, 특히 시리아·리비아·예멘 내전이 촉발한 대규모 난민 위기는 중동을 넘어 유럽과 세계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5년 약 100만 명의 난민과 이주민이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도착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출신이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우리는 해낼 수 있다(Wir schaffen das)’ 정책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동시에 유럽 전역에서 반이민·반무슬림 정서와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을 촉발했습니다. 브렉시트(Brexit), 헝가리·폴란드의 권위주의적 전환, 유럽 각국에서의 극우 정당 약진 등은 모두 이 난민 위기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IS(이슬람국가)의 부상과 몰락
아랍의 봄이 만들어낸 권력 공백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등장한 세력이 IS(이슬람국가, ISIS/ISIL/다에시)였습니다. 이라크 전쟁 이후의 불안정과 시리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2014년 6월 IS는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을 전격 점령하고 ‘칼리프국’을 선포했습니다. 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는 전 세계 무슬림에게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IS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걸쳐 영국 면적과 맞먹는 영토를 장악하고 약 800만 명을 통치했습니다. 참수 영상 공개, 성노예 제도(야지디 여성들에 대한), 고대 유적 파괴(팔미라, 니네베), 국제 테러 공격(2015년 파리 공격, 2016년 브뤼셀 공격 등)으로 세계를 공포에 빠뜨렸습니다. 미국 주도의 국제 연합군과 이라크군, 쿠르드 SDF, 이란 지원 시아파 민병대의 합동 작전으로 IS는 2017년 모술, 2019년 바구즈(시리아 동부의 마지막 거점)를 잃으며 영토적 ‘칼리프국’은 붕괴했습니다. 그러나 IS의 이념과 조직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으며, 이라크·시리아의 사막 지대와 아프리카(사헬 지역, 모잠비크 등)에서 게릴라·테러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랍의 봄 15년, 중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26년 현재, 아랍의 봄이 시작된 지 15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광장을 가득 채웠던 ‘자유, 존엄, 사회 정의’의 구호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튀니지의 민주주의마저 위기에 처하면서 ‘아랍의 봄은 실패했다’는 비관적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좀 더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유럽의 민주화 역시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반혁명, 왕정 복고, 세계 대전 등 2세기에 걸친 혼란 끝에 비로소 안정적 민주주의를 확립했습니다. 동유럽의 1989년 혁명 이후에도 일부 국가는 민주주의로 안착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권위주의로 회귀했습니다. 아랍의 봄이 불씨를 지핀 변화의 힘 — 시민 의식의 각성, 정치적 상상력의 확장, ‘국민이 체제 타도를 원한다’는 인식의 확산 — 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2019년에는 알제리와 수단에서 ‘제2의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알제리에서는 히라크(Hirak) 운동이 20년간 집권한 부테플리카(Bouteflika) 대통령을 축출했고, 수단에서는 30년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가 민중 시위와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다만 수단은 이후 군부 간 권력 투쟁으로 2023년부터 참혹한 내전에 빠졌습니다). 이라크와 레바논에서도 2019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종파주의 정치 체제에 대한 젊은 세대의 거부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랍의 봄은 중동 현대사의 단일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거대한 변동의 한 장(章)입니다. 이 변동의 근본 원인 — 경제적 불평등, 청년 실업, 정치적 대표성의 부재, 부패 — 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이것이 해소되지 않는 한 그 에너지는 어떤 형태로든 다시 분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며 —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아랍의 봄은 중동 시민들이 수십 년간 축적된 억압과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높인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대부분 실망스러웠다 해도, 수백만 명이 ‘두려움의 벽’을 넘어 광장으로 나선 그 경험 자체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 튀니지 시위 참가자의 말이 이를 요약합니다. “우리는 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아직 벽 뒤에 무엇을 지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벽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증명했다.”
다음 52화, 시리즈의 마지막 회에서는 지금까지 52주에 걸쳐 살펴본 중동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되돌아보고, 오늘날 중동이 직면한 과제와 미래를 전망하며 시리즈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첫 문자에서 시작하여 아랍의 봄까지, 5,000년 중동 역사의 긴 여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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